예언자는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코 6,1-6)

2013. 2. 6. 오전 7:38:32

글자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 6,1-6

 

시련이 당장에는 슬픔을 안겨 주지만, 그것을 참고 견디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준다. 시련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훈육으로 여겨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학벌, 출신 직업과 혈연관계 등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본 나머지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기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복음).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두 번째로 담은 대목입니다. 첫 번째 지역은 카파르나움이고(1,21-28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번째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입니다. 그런데 비슷하면서 다른 이 두 대목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두 회당에서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릅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1,22) 모습에 놀란 것이고, 나자렛에서는 자기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르침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놀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6,3 참조). 이 두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 역시 대조적입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는데, 정작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는 몇몇 이들에 대한 치유밖에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과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고향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학벌이 변변찮으시다는(6,2 참조: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것을 알고 있었고, 능력을 지닐 만한 직업도(6,3 참조: “저 사람은 목수로서”), 가문도(6,3 참조: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믿음을 갖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또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생각의 틀을 넘어

 반영억신부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믿음과 믿지 않음의 차이>

송영진 모세 신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자 사람들이 놀라면서 말합니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2)"

 

이 말은 '예수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일까? 사람에게서 배운 것일까?' 라는 뜻인데, 일단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루카 4,22)이다.' 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라는 말은, '예수의 기적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일까? 사탄에게서 온 것일까?(마르 3,22)'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도 기적을 행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뒤의 5절,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셨다.' 라는 뜻이 됩니다.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말이 없는데,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나자렛에서도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가 아니라 목수로 알고 있고(마르 6,3), 목수인데도 지혜로운(은총으로 가득 찬) 설교를 하시니까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 때문에 여러 번 놀랐지만, 그들은 그 놀라움 덕분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라는 구절에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서 '고향'은 나자렛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라는 말을 했고, 예루살렘의 최고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요한 7,52).

또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에 대해서 놀라면서도 믿음을 갖지는 않은 모습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카파르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기적을 보면서 놀라긴 했지만(마르 1,21-27) 그냥 놀라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놀랐는데(요한 7,15), 그 놀라움이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우리 역시 나자렛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이라는 말씀은, 고향과 친척과 집안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존경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믿게 되고,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존경'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라는 구절의 '놀라셨다.' 라는 말은 '안타까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아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청하지 않았으니 주시는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을 수 있는 은총도 못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주셨는데도 사람들이 못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을 단순히 편견과 선입관 때문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나 로마 출신이었다면? 외양간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궁전에서 태어나셨다면?

유명한 랍비가 스승이었다면?

그랬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을까?

 

바오로 사도는 유명한 랍비의 제자였고, 열성적인 바리사이였고,

정통 유대인이었지만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어쩌면 더 많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미워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내가 세상을 두고 그 일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요한 7,7)."

 

또 '죄의 종'(요한 8,34)이었기 때문에(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관은 죄와 악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는 한 단면일 뿐입니다.)

자기 안에 빛이 있으면 빛을 향해서 더욱 나아가고,

어둠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욱 어둠 속으로 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5-36)."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예수의 소문이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마르6,14-29)13.02.08조회 45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 (마르코 6,7-13)13.02.07조회 45예언자는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코 6,1-6)13.02.06조회 45달리다쿰..소녀야 일어나라! (마르 5,21-43)13.02.05조회 773마귀들과 돼지 떼 (마르 5장 1-20)13.02.04조회 6902월 2일 봉헌 축일 / 봉헌 생활의 날13.02.02조회 51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26-34.)13.02.01조회 213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마르 4,21-25)13.01.31조회 44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코. 4,1-20)[3]13.01.30조회 1,539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마르코 3, 33-35)13.01.29조회 62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마르코 3,22-30)13.01.28조회 45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루카 10,1-9)13.01.26조회 451월 25일 금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코 16,15-18)13.01.25조회 44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마르코 3,7-12 )13.01.24조회 876“손을 펴라.” (마르3,1-6)13.01.23조회 1,204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2,23-28)13.01.22조회 482“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코 2,18-22)13.01.21조회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