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쿰..소녀야 일어나라! (마르 5,21-43)

2013. 2. 5. 오전 7:11:07

글자

 

2013년 2월 5일 화요일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불확실한 전설이지만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카타니아 혹은 팔레르모(Palermo)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심이 깊어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 지방의 집정관이던 퀸티아누스(Quintinianus)가 그녀를 탐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다.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티아누스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으며,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 죽였다고 전해온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보통 한 쌍의 집게나 접시에 담은 그녀의 가슴으로 묘사되었는데, 후일 이것이 잘못 전해져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성녀 아가타의 축일에는 빵을 축성하는 관습이 내려온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든 이가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들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모습이 숨어 있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나눔의 생활은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풍요를 나누면 되돌아온다. 주님은 베푸는 자에게 너그러운 분이시다(제2독서). 야이로는 정통 유다인이었지만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딸을 살려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탈리타 쿰!” 이 한마디로 죽은 소녀를 살리신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이 너무나 놀라워 주님의 입에서 나온 ‘발음 그대로’ 후대에 전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여인은 부끄러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참담한 생??들었습니다. 그나마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친 여인에게 누군가 예수님의 소문을 전해 줍니다. 어떤 질병도 낫게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인은 다시 기대를 겁니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며 애원합니다. ‘감히 당신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비참한 병을 낫게 하여 주십시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황당해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놀란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미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우발적 행동이 기적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오랜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좌절을 딛고 애절한 믿음으로 다가갔기에 기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습니다. 누구나 좌절을 체험합니다. 삶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은 인생의 새로운 에너지로 바뀝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 장면에서 두 종류의 접촉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밀쳐 대는’(31절) 모습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27-28절) 모습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밀쳐 댔습니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은 손을 댔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밀쳐 대는’ 접촉으로 일어난 기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손을 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아픈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밀쳐 댔기’ 때문에 예수님과 상응되지 않았습니다. 상응은 ‘손을 댄’ 사람에서만 드러났습니다.
반면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밀쳐 대는’ 것이 아닌 ‘손을 대는’ 것입니다. 밀쳐 대는 것이 호기심과 욕심의 발로라면, 손을 대는 것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밀쳐 대는 것이 자기는 그대로 있으면서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손을 대는 것은 나에게서 그에게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밀쳐 대는 것은 상대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보는 것이지만, 손을 대는 것은 상대를 ‘그것’이 아닌 ‘너’로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손을 대는 것은 마음을 담은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많은 군중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둘러쌌고, 예수님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상응하고자 그분께 ‘손을 대십니까?’ 
 


 

 <예수님의 자비>

송영진 모세 신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후에 병이 낫게 되는데,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님의 옷이 그 여자를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그 소녀를 살려내시는데, 예수님의 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려 내셨습니다. 지금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와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바오로 사도의 몸에 닿았던(바오로 사도가 사용했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것은 그 자리에 바오로 사도가 없어도 (바오로 사도가 직접 병자를 만나지 않아도)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수건이나 앞치마가 행한 것도 아니고, 바오로 사도가 행한 것도 아니고, 하느님(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수건이나 앞치마에 병을 고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냥 미신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사도 5,15-16)."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가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고, 베드로 사도가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고, 하느님(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만일에 하느님(예수님)을 믿지 않고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를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 이야기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의지입니다.
'벳자타 못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예수님께 자기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요한 5장).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만난 '눈먼 거지'도 예수님을 몰랐고, 예수님께 자기의 장애를 고쳐 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9장).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그 여자가 아무도 모르게(예수님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래서 병이 나았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 일을 알아차리고 여자를 찾으신 것처럼 되어 있는데, 

예수님도 모르는 사이에 기적의 힘이 예수님에게서 빠져나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딱한 사정을 먼저 아셨고, 그 여자를 고쳐 주셨고,
그 여자에게 치유의 은총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들 앞으로 불러내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상황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의 주도권은 여자가 아니라 예수님 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선택권과 결정권은 병자가 아니라 언제나 항상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언제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는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밀쳐 댔던 군중 가운데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믿음과 미신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만일에 오늘날 어디선가 바오로 사도의 수건과 앞치마가 발견된다면?
얼마나 큰 소동이 생길지...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믿음으로 승리하라

 반영억신부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아쉬울 것이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취한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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