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말씀의 초대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좌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이들은 보호하시고, 계명에서 벗어난 자들은 모른 체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살 길은 분명하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다. 그분만이 민족의 희망이 되신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신다. 십자가는 고통이다. 억울한 고통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부활을 암시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말씀하시면서 부활의 약속도 함께 하신다. 새로운 눈으로 십자가를 보아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준비합니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음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순 시기는 ‘내 몫의 십자가’를 찾는 기간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내 생각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우선해 보는 훈련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부활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신비입니다. 체험이 없었다면 올해 사순 시기에는 겪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 보십시오.
부활에 대한 빠른 접근은 잡은 것을 ‘놓아 보는’ 연습입니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사상이든 취미든 한 발자국 물러나 보는 시도입니다. ‘정말 놓아서는 안 되는지?’ ‘정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자꾸만 돌아보는 것이지요.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를 받았습니다. 그 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의 수요일’ 예식은 다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한 줌 재가 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언약입니다. 이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첫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형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죽음을 체험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인지요?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늘의 이끄심’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비참한 상황’을 극복해야 부활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의 희망으로 지는 십자가가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조재형신부(용문청소년수련장)
어제 우리는 신앙의 해를 시작하면서 ‘재의 수요일’을 지냈습니다. 동창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신앙과 신심’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우리들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심은 그런 신앙생활을 잘 하기위한 우리들의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는 신심행위입니다. 묵주기도, 성체조배, 9일기도와 같은 것들도 신심행위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본래 추구해야할 신앙생활과는 멀어지는 신심행위가 있습니다. 신심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신심행위를 통해서 나와 나의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모두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스카풀라와 기적의 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의 본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는 다짐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일종의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건강해지고,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분명 신앙을 위한 신심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생각할 수 없듯이 신앙은 분명 우리들의 희생과 나눔 위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건강남과 부실남’의 하루를 보았습니다. 둘 다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건강남은 점점 건강해지고, 부실남은 점점 몸의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이유는 하루하루 생활하는 삶의 태도와 습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건강남의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물을 한 컵 먹고, 운동을 합니다. 아침식사는 야채와 두부를 먹습니다. 회사에서는 할 말은 하고, 자주 웃으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3,4층은 굳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회식자리에서도 가능하면 술을 적게 마시고, 꼭 마셔야 하면 안주를 많이 먹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가능하면 11시 이전에 잠을 잡니다. 이런 건강남은 하루가 즐겁고, 즐겁습니다.
부실남의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전날 술을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층수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입에 좋은 컵라면을 즐겨 먹습니다. 운동보다는 컴퓨터의 게임에 몰두합니다. 회식자리에서는 빈속에 먹어야 좋다며, 안주를 거의 먹지 않습니다. 2차는 기본이고, 기분이 좋으면 3차, 4차까지 가서 술을 마십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속이 쓰리니, 또 라면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부실남은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허리도 아프고, 얼굴에 윤기가 없어집니다. 아직은 젊기 때문에 몸이 버티지만 둑이 무너지듯이 언제 건강이 나빠질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지만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도 하고, 병원신세를 지는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선택은 본인들의 몫입니다. 오늘 성서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선택할 것인지, 본인의 욕심과 세상의 것들을 선택할 것인지 정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따라가면 멸망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에 선택을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남을 탓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원망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감당하기 힘들지만 기꺼이 짊어지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성 요한 비안네)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피스) 사랑합니다.
오늘은 밸런타인데이
이명언마태오신부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고 하지요. 원래는 성 발렌티노(Valentinus, 밸런타인은 영어발음)의 축일로, 성인께서 순교하시기 전에 젊은 연인들을 연결해주셨다고 해서 2월 14일을 연인들의 날로 ‘밸런타인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연인의 날이라기보다는 상술만이 난무하는 날처럼 보이네요. 즉, 사랑한다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사람들을 유도하면서, 사랑보다 초콜릿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가 기억납니다. 그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음식 속에 반지를 숨겨서 깜짝 놀랄만한 연출을 했지요. 물론 여자는 이 이벤트에 감동을 하고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 모습을 보고서 “정말로 저렇게 하면 감동하겠다.”라고 한 청년에게 말했더니만, 그 청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소중한 결혼반지가 입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뭐가 좋겠어요? 반지 함에 넣어 정성껏 주는 반지를 여자들은 더 좋아해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보이기 위한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초콜릿도 보이기 위한 것이고, 또한 각종 청혼 이벤트 역시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이 전부인 듯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뒤에 모든 사람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대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려 죽지 않으려고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으며 배고픔 없는 풍요로운 삶을 찾아 왔더니만 오히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하느님의 관점, 물질적인 관점보다는 사랑의 관점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고, 도저히 따를 수 없다며 등을 돌리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원하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그토록 노력해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오히려 행복과 더 멀어졌고, 그래서 더 많은 풍요와 더 높은 지위만을 추구했지만 더 힘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우리에게 내미십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주님께서 제시하신 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의 뜻을 버리고
반영억신부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3년 전 한 자매와 그 자녀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가스폭발로 큰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몇 일전 재수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저는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유리창이 깨져 멀리 날아가 버리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 아내의 참혹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고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아내의 상처가 너무 심해 아들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내는 말했습니다. “감사미사를 봉헌하라!”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인가?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감사하라니.....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사고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어린 손자손녀가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순간 “감사미사 봉헌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손자 손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또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3일만 고생하면 될 것을! 이렇게 살아서 고생을 하게 해 미안하다.”고.
참된 믿음은 어려울 때 알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믿음의 사람이 가야하는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고통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치료해야 할 일이 ‘산 너머 산’이지만 이내 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면 매순간이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앞세우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나는 따를 뿐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30,15)“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30,1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겨 생명을 선택하고 “제때에 열매를 내며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