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27-32) |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우리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고 전한다. 사랑과 자선의 행위가 빛이고, 어둠을 대낮으로 바꾸는 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없지만,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느 분이 대답하시기를, “너 행복하냐?”라고 하셨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돈이나 모으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지를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하셨을 것이라는 그 질문은 사실은 이런 묵상을 한 바로 그 사람에게 던지신 물음이기도 합니다.
가끔씩 우리도 자신에게 ‘나는 진정 행복한가?’ 하고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잠시 느끼는 만족을 행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은 사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 이미 언젠가는 그 기쁨을 잃어버릴 ‘허망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을 가지고 우리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하는 행동, 하고 있는 일, 추구하는 이상이 ‘영원한 것’에 가 닿아 있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젠가는 허망한 슬픔으로 바뀌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신 이유도, 레위의 그 삶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그늘을 안고 살면서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새로운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레위는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
세리 ‘레위’는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오’입니다. 그는 제자가 된 뒤에 이름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세리 레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 ‘마태오’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마태오’의 말뜻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이들도 색안경을 끼고 봤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리러’ 오셨음을 천명하십니다. 그들에게 ‘천상 기운’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부르심에 선뜻 나섭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갑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세리였지만, 안정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포기한 것입니다. 그만큼 레위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풉니다. 레위의 예의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 당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도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내놓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세리 레위’의 모습은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일을 맡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인체 하는 죄인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인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31,34).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12,47)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시기 바랍니다.(성 베르나르도)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1,9).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 왕 중의 왕이라고 했던 다윗,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주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인정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며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그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조명언 마태오신부
제가 꼭 피하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바쁘게 일처리를 한 만큼 제대로 일이 돌아갈 리도 없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여유를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사순절 특강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강의 준비에 대한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저녁 역시 모임이 있었지만, 이 시간에 강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또 굳이 이 모임에 제가 참석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초조하게 산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단지 불안감만 생길 뿐이지요) 모임에 참석했고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우리들이 많이 쓰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이 말의 다른 뜻은 ‘내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언제나 의무와 목표와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다 보니,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세상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즉, 나의 시간들을 남의 것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들을 나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내게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바쁘고 여유가 없는 것 같았지만, 모임에 참석함으로 인해 오히려 여유를 갖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많이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쾌한 시간으로 인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바빠!’라는 말을 내 삶의 금지어로 만들어 버리면 어떨까요? 남을 위한 시간이 아닌, 나를 위한 시간을 살 때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약 3년의 시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에는 참 적은 시간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매스미디어가 발달되어 있던 시대도 아니었기에, 바쁘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에 시간이 형편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면서 잔치에 참여하시지요. 이 모습이 하느님의 일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까요? 이럴 시간에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점이 못마땅했습니다. 의인들과 함께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오히려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있으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진정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그래서 사랑보다는 미움을 간직하고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