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말씀의 초대
엘리야는 하느님의 사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쇄신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 위대한 예언자였다. 엘리사 또한 스승인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향하여 횃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백성은 뉘우치지 않고 죄를 끊어 버리지도 않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참된 기도의 전형을 가르쳐 주신다. 이방인들은 빈말을 되풀이하지만,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과 맺어야 하는 단순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보여 준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외워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깨닫고, 그것을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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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드리는 대화입니다. 꼭 무엇을 해 주십사고 요청하기보다는, 우리가 놓인 삶의 처지에 따라 감사도, 청원도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통째로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모든 말씀을 온전히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물며 주님과 나누는 대화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 인간에 대한 당신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 실현해 주십사 하는 청원입니다. 둘째는,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 곧 일용할 생활양식, 형제자매들인 이웃과 맺는 따듯한 관계, 그리고 끝까지 항심(恒心)을 잃지 않게 해 주십사 하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다른 모든 기도의 내용도 그러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면서 자신의 바람만 청원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잘 경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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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언제 어느 때 바쳐도 좋습니다. 어느 구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좋았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어른인 지금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옛날에는 ‘개인적인 양식’만 생각했으나 이제는 어려움에 놓인 이웃도 생각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이론은 많습니다. 교리적인 해석 또한 다양합니다. 시대에 따라 숱한 가르침이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신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도 ‘예수님의 표현’만큼 단순하고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으니 얼마나 명쾌한 해석입니까! ‘아버지’란 말 이상으로 하느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어디에 또 있을는지요?
남은 일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이 땅은 어디입니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현실’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고, 내 자신이 가꾸어 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곳에 ‘아버지의 뜻’이 머물러 계시기를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반영억라파엘신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알코올 의존증을 진단하는 검사엔 이런 항목이 있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면 꼭 술을 마시고 싶다, 공휴일에는 낮부터 마신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 손가락이 떨린다.” 등 그중에서 필름이 종종 끊긴다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 항목에 해당하는 경우 알코올 의존증 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술을 마셔도 내가 사는 집은 잘 찾아옵니다. 경험 때문일까요 ? 집을 찾아온다는 것에 대해 뇌에서는 기억을 하는 데 필름이 끊기는 것은 ‘단기 기억’ 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기 기억’ 은 남아 있기에 오랫동안 습관화된 발걸음으로 집을 찾아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때로 냉담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냉담을 해도 ‘그래도 성당에는 가야 하는데 ….’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과 관계된 것을 보거나 말하면 마음이 찔립니다. 그런데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냉담을 하면 ‘가야 하는 데 ….’ 하는 생각도 잘 안 난다고 합니다. 신앙에도 ‘장기 기억’ 과 ‘단기 기억’ 이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무엇인지, 강론 내용이 무엇인지는 잊어도 됩니다. 단기 기억은 잊어도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핵심이 되는 기억, 장기 기억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장기 기억’ 을 하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그 한마디 한마디의 가르침을 새롭게 되새기고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