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 (마태오 25,31-46)

2013. 2. 18. 오전 7:08:57

글자



2013년 2월 18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말씀의 초대

거룩한 삶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곧 도둑질, 사기, 거짓 맹세, 불의, 악담 등의 사악한 행위를 경계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신다. 그리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여부를 우리 삶에 대한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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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음의 예화를 통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수사들이 서로를 너무나 미워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고민하던 수도원장은 결국 그 나라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현인을 찾아갔습니다. 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 수도원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신 채 수도자의 겉모습으로 계셨습니다.”
무척 놀란 수도원장은 곧바로 수도원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수사들은 이제 ‘누가 예수님일까?’ 하고 서로 관찰하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잘못한 부분들이 있으면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한두 달 지속되자, 수도원은 형제애로 가득 찬 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누가 예수님인 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수도원장이 다시 그 현인을 찾아가 물어보자, 현인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그 수도원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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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그날은 선택의 날입니다. 임금님은 자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사람들을 갈라 세웁니다. 준비된 나라로 함께 갈 사람들과 선택에서 제외되는 이들입니다. 기준은 단순합니다. 이웃을 어떻게 대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웃의 작은 이들’에게 어떤 처신을 했느냐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작은 이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내가 책임질 사람입니다. 그들을 모른 체했으니 나도 너를 모른 체한다는 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작은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는 것이 두려운 이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될는지요? 희망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말과 희망의 몸짓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
작은 이는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먼저 그 대상이 내 자신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스스로를 편견과 열등의식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면 빨리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완성은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종말의 구원 역시 그분께서 허락하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라도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작은 이들’을 그분처럼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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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어떠한 죄와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헤아리시기보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주었고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아 용서를 청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웃을 위하고 또 얼마나 진정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지에 그 가치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선행이야말로 악행을 이겨 내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 마음의 초점이 늘 악행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평생 악행과 싸우는 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온 삶이 선을 쌓으려는 의지로 향하기 때문에 어느덧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악을 피하려는 것보다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있음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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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인이 된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여,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곧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곳이다.”
이어서 그는 영생과 심판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 微?만든 자기 자신의 모습, 곧 홀로 족한 자인가 아니면 공감하는 자인가를 보게 되는 광명의 순간이 바로 심판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심판관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단순한 기쁨』에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굶주린 사람, 헐벗고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와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주님께 해 드린 것이며,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해 드리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살아 온 모든 것, 곧 홀로 만족하며 살았는지, 남과 나누면서 살았는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모두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은 뒤에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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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보잘것없는 이가 바로당신이시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지나쳤던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 당신 모습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분이 되셨습니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일생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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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모시고 사는주님이 우리 삶 안에 계셔야 합니다. 방에 십자고상만 있다고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보다 못한 작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만 그들이 내가 모시고 사는주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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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주로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요? 그리고 왜 그들을 만나는지요? 그 만남에서 우리 자신이 섬기는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되는지요?


심판의 기준은 사랑

 반영억신부

얼마 전 저녁이었습니다.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이 신부님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구걸하러 온 사람이라 생각되어 보좌신부에게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돈을 주어 보냈답니다. 누구인지 만나보지도 않고 선입견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사람도 있다고 하거늘 저는 구걸하는 사람을 돈을 쥐어 보낸 것으로 만족해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상대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아무 선입견 없이 신속하고 민첩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해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어야 합니다. 아마도 속을 뻔히 알면서도 베푸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 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이 많이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오른 편에 당당히 서기 위해>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최후 심판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되는 세상 마지막 날의 때로 참혹하고, 때로 끔찍한 모습에 살짝 걱정도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경우만 해도, 그날이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니 제 개인적으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위협이나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격려와 자극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영광스럽게도 만왕의 왕 예수님 오른 쪽에 서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특별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더군요. 하느님 오른 편에 서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변장해서 찾아오시는 우리 주변의 ‘작은이들’을 환대한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요. 역 주변을 떠도는 노숙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지 않고 한 형제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사랑의 밥 나눔’ 봉사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쌀 모으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강도 높은 영업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이지만 팔다 남은 빵을 들고 기쁜 얼굴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나서는 사랑의 빵장수들입니다.

 갈 곳 없어 떠도는 사람들을 내 집에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매년 1000명 이상의 우리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그 아이 중 하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입양해 내 자녀처럼 키우는 사람은 100% 오른 편에 설 사람입니다.

 옷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는 쌩쌩한 옷들로 꽉 차있습니다. 과감하게 정리해서 꼭 필요한 곳에 택배로 보내는 사람, 하루 온 종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무료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시립 무료 병원 환자들을 찾아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춥고 음산한 담장 안의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매주말 김밥을 싸고 반찬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 모두 당당하게 예수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마지막 날 앞에서 두려워한다거나 부들부들 떨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 남았군요.

 마지막 날에 가서는 우리가 그간 이웃들에게 행한 사랑의 봉사는 모두 인류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공경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입니다. 인간과의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당당하게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심판의 기준>

2월 18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25장 31절-46절, '최후의 심판'인데, '사랑 실천'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가장 작은 이들'은 '굶주리는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입니다(35절-36절, 42절-43절).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사실상 예수님입니다(40절, 45절).

의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고, 악인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의인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악인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37절-39절, 44절)." 의인들은 사랑을 실천했으면서도 자기들이 사랑을 실천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은 뭔가를 하긴 했고, 자기들이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그 답이 있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악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요즘 식으로 바꾸면,'조폭들도 자기들끼리는 사랑 실천을 잘한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또 루카복음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악인들은 자기의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만 초대한 사람들이고, 의인들은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흔히 사용하는 '지금 바로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다.' 라는 말이 하나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대개는(거의 항상)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내가 평소에 일상적으로 만나고 어울리는 사람은 나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고, 뭔가 나와 어울릴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지 않은 사람, 평소에 내가 곁에 두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항상 자기 곁에 두어야 한다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때에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복지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 경우에는 늘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고, 늘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을 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고 편 가르기를 할 수 있다는 함정입니다.
(봉사자들과 그 봉사를 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되지 못하고 따로 구분되어 있다면, 그래서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확연히 갈라져 있다면, 그것은 곁에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신학교나 수도원 같은 공동체의 경우,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들끼리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옆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만' 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이란 밖으로 흘러넘쳐야 하고, 사실 '안'보다는 '밖'으로 더 많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안'에서만 고여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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