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루카 11,29-32)
말씀의 초대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니네베는 사십 일이 지나면 무너진다고 전한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단식을 하며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의 표징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당신께서 하느님의 표징이심을 이미 드러내셨다. 그러나 니네베 사람들과 달리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뵙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보고도 볼 수 없는 눈 뜬 장님과 같은 사람들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여러 표징을 받았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구를 들으실 때마다 시대의 징조를 모르는 그들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이루신 기적을 듣고 보았더라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표징이심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손길을 보았으면서도 일부러 외면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악의에 차 있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어느 일간 신문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어린이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는 열세 살 소년으로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작가가 꿈이었던 어린이가 2년가량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그 아픔을 일기로 썼습니다.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에게 백혈병이 왔다.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내게는 맞는 골수가 없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살려 줬으면 좋겠다. 바다에 가 보고 싶다. 파란 하늘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이런 것을 느끼기만 해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았다. 살아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공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푸른 하늘, 이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 어린이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기적일 수 있습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 봄맞이하며 재잘대는 계곡의 물소리,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웃의 친절 …….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의 선물이며, 우리가 사람들을 통해 날마다 누리는 축복입니다. 삶은 자세히 바라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매우 짧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발걸음을 늦추고 우리 주변에 있는 놀라운 보화들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흥정입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이 있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기적을 확인하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가 연출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기적적인 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먼저입니다. 새 마음으로 기도와 성사 생활을 하면 기적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현대판 솔로몬’을 찾고 있습니다. 물질을 앞세워,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솔로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욕심에서 조금만 물러서면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걸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기적은 정성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심혈을 기울이면 ‘기적적인 일들’은 일어납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망각하기에 욕심에 빠집니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특이한 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예언자가 싫다며 먼 곳으로 달아나려 합니다. 당시 예언자는 신분을 보장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카리스마’가 인정되면 먹고사는 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언자의 신분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얽매이는 것이 싫었거나 아니면 남다른 취미 활동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말로써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12). 요나는 마음을 비웠던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서 ‘하늘의 표징’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
열왕기 상권 10장 1절에서 13절을 보면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었던 ‘스바’라는 나라의 여왕이 솔로몬 임금의 명성을 듣고 그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스바는 문명국이었고, 솔로몬 임금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또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지혜가 얼마나 출중한지를 시험하고자 많은 것을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답변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인격이 훌륭하였기에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에티오피아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편,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 있던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곧, 요나는 하느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거나 불을 내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회개하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대로, 그들의 성읍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 예언을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니네베 사람들도 스바 여왕도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지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이방인의 모습은, 마음이 돌같이 굳어 버린 유다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짝사랑의 괴로움>
양승국신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 정녕 고통스런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응답 없는 사랑’ 다시 말해서 ‘짝사랑’이란 것,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랑을 보내는데, 다양한 몸짓으로, 여러 가지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눈길을 외면합니다. 딴전을 부립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한 ‘짝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짝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오가는 맛이 있어야 제격인데,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사랑은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도 끔찍이 우리를 챙기시는데, 그리도 간절히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우리는 그분께로 눈길 한번 드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부답인 우리 때문에 늘 괴로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결코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유로움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예속되셨다는 것. 사랑스런 손자손녀 앞에서 꼼짝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속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완전무결하신 하느님, 우리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없이는 하느님이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시고, 우리 없이는 행복하지 못하겠노라고 단언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이것처럼 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 사건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구세주께서 죄인들 앞에 벌거숭이로 서셨습니다. 조롱의 표시로 병사들은 예수님께 홍의(紅衣)를 입힙니다.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웁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한갓 병사들 앞에 고개를 숙이십니다. 그 철없는 인간들은 존귀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침까지 뱉는군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십자가 위로 자진해서 올라가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마음만 먹었다하면 지금까지의 최악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의 예수님께서 인간의 횡포 앞에, 인간의 실수 앞에, 인간의 착각 앞에 침묵하십니다. 그저 조용히 희생제물이 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도 기적과 표징만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을 향해 강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 갑자기 먹구름이 걷히고 나타나는 십자표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암세포... 사실 이런 기적들은 대체로 유한한 기적입니다. 치유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치유의 은총을 입었다고 합시다. 끝없이 치유가 계속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영원히 살겠습니까?
결국 진정한 의미의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함을 통한 기적입니다.
우리가 매일 지고 가는 십자가를 얼굴 찡그리지 않고, 투덜거리지 않고, 오히려 환한 얼굴로,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지고 가는 것이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입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유능하지만,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기쁜 얼굴로 상대방의 밑에 서는 것이 또한 기적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끊임없이 우리 인생 안으로 드나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무수한 십자가, 힘에 겨운 십자가 앞에 울고불고, 힘들다고, 외롭다고 외치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중의 왕십자가인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 고독과 소외라는 십자가, 배척이라는 십자가, 낙담과 내적 번민이라는 십자가, 이 모든 십자가를 나 홀로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지고 오셨고, 앞으로도 함께 지고 걸어가실 것이기에 십자가 앞에서도 행복해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 안에 머물러라
반영억신부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에 부임해 온지 2년 반이 되었습니다. 성당 제단 위쪽에는 성모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부터 총탄을 7발이나 맞고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난 받으신 성모님,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분들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 하여 치유를 받았기에 치유의 어머니라고도 합니다.
저는 성모님 앞에서 미사를 봉헌해 왔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면 성모님의 형상이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며 성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느님, 제발 어머니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는데 너무도 짧은 순간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찰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번 만 더요!”했습니다.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 성모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다시 한 번 만요!” 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보여주시며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감각적인 표징을 요구하며 살았던 저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주님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 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중이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더 큰 것을 바라기에 앞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기적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많은 실수와 잘못, 허물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힘입어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영성체를 통해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