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의 열쇠 (마태16,13-19)

2013. 2. 22. 오전 6:54:57

글자

2013년 2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16,13-19)


말씀의 초대

예수님에게서 ‘내 양들을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베드로(요한 21,15-17 참조)는 이제 자신의 서간에서 교회의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열성을 다해 돌보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를 당신 백성의 반석으로 삼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본디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튼튼한 머릿돌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름을 주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곧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는 그다지 반석과 같은 인물감이 되지 못합니다. 반석이라고 하면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신앙과 변함없는 충절이 있어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합니다(마태 26,34 참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물 위를 걷다가도 그 믿음이 흔들려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합니다(마태 14,28-31 참조). 그리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지도자가 되었던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을 버려두고 로마에서 도망치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튼튼하기보다는 나약하고, 충절이 있기보다는 배반의 사도였으며,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보다는 자주 흔들리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 시몬은 나약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그는 자주 흔들렸지만,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어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어느 한 공동체의 ‘베드로’, 곧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간관계라는 실타래
-김경진 신부-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등지고 으르렁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미워하는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겉으로는 친한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여러 사람과 틀어진 채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 땅에서 매여 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럼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라고 하는 실타래를 잘 풀어야 할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잘 풀려면 서두르지 말고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잘 살펴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이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위한 기술입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한 캠페인으로 이렇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서로를 알아줍시다.”

서로를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드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알아주셔서 하늘나라 열쇠까지 맡겨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때문에 살맛 나고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맛이 났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문구가 생각나네요. “서로를 몰라줄 땐 서운함 가득, 서로를 알아줄 땐 기쁨이 가득!” 서운함은 자칫 미움을 낳고, 미움은 증오를 낳고, 영적 살인인 무관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상대방이 “제 맘 알지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줍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럼 얽혀있는 실타래가 술술 풀리고 오늘 하루가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으뜸중의 으뜸

반영억신부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 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 김인순 수녀-
 누군가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 자체이신 분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어느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엄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 늘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정의는 몇천, 몇만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 각자의 처지와 경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표현이 일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 전체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알려주기엔 너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각자가 지닌 인간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
저 또한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마음의 경향에 따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규정지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저의 인간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분이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아 나가고 있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도
.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지식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짧고 빈약한 저의 인간적인 깨달음에도 실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올바른 모습을 알려주시려고 끊임없는 인내와 격려로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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