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러 왔고 (마태 20,17-28)

2013. 2. 27. 오전 7:18:45

글자

2013년 2월 27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17-28)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의 반대자들은 그를 없앨 궁리를 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이들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도우심을 청한다. 지난날 자신과 함께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동족의 배신을 마음 아파한다(제1독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하늘 나라에서 두 아들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다. 두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순수한 마음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결정은 아버지께서 하신다는 말씀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편애하셨습니다. 중요한 자리에는 두 사람을 언제나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룩한 변모’ 때도 그렇게 하셨고(마태 17.1 참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마르 5,37 참조). 늘 베드로와 함께 두 사람을 당신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 사람을 특별히 대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요한과 야고보는 조금은 으쓱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청을 드립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스승님께서는 진화에 나서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고,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훗날 제자들의 삶을 규정짓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건만 제자들의 반응은 엉뚱합니다. 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까지 가세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스승님 곁에 앉게 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소박한 청원이었습니다. 별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서운한 마음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고통의 잔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당신 곁에 머물 수 없다는 암시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잔을 받아들여야 주님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넘어지더라도 자신의 십자가를 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넘어지기도 하셨고, 시몬의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베로니카와 예루살렘 부인들의 위로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의 잔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도와 희생을 함께하는 행위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봄가을에만 꽃이 피는 줄 압니다. 하지만 여건이 갖춰지면 언제라도 꽃은 피어납니다. 하지만 봄가을의 꽃은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가야
자신만의 향기를 지닐 수 있습니다.
 ☆☆☆   

<먼지처럼, 티끌처럼>
양승국신부

오늘날 우리가 우러러보는 대부분의 성인(聖人)들이 지니고 있었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단히 작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려가기를 바랐습니다. 한결같이 겸손의 덕을 쌓아갔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같은 경우 최종 목표가 자신이 부서지고 부서져 마침내 먼지처럼, 티끌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역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대수도회의 창립자이면서 총장이었던 그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으며, 그들에게 즐겨 순명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도 ‘겸손의 덕’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가 이뤄낸 기적 같은 일들 앞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대단하다’고 칭찬할 때 돈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또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하신 일입니다.”

 

돈보스코의 제자인 가경자 치마티 신부 역시 겸손 빼놓으면 시체였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탁월한 재능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몬시뇰이란 직책이 부여되자, 그는 그렇게 송구스러워했습니다. 수도회 총회 기간 동안,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대의원들이 그에게 중책에 임명할 것을 건의하자 그는 일부러 바보처럼 행동해서 높은 자리에 앉을 ‘위기’를 피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서글픈 체험 한 가지를 하고 계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이 눈앞입니다. 정녕 피하고 싶은 잔입니다. 아무리 신인(神人)이신 예수님이셨지만 예견된 끔찍한 죽음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런 표시로 제자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슬픈 최후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십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참으로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된 도리로서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침묵 속에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두 제자, 야고보의 요한, 그리고 그의 어머니 살로메의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얼마 있지 않아서 맞이하게 될 끔찍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철없는 사람들, ‘인사 청탁’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살로메, 인사 청탁하는 데 그냥 왔겠습니까? 양주 한 병이나 씨암탉 한 마리 보자기에 싸서 예수님께 드리면서 청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통탄할 노릇이었습니다. 떠날 날은 멀지 않았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의 모습 앞에 한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내 모습,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송구스런 마음과 더불어 ‘사도들께서도 그러셨는데...’하는 마음과 함께 솔직히 어느 정도 안심도 됩니다.

 

여러 측면에서 어려운 이 시절, 우리 모두가 좀 더 낮아지길 바랍니다. 낮아지면 좀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좀 더 편안한 자세로 오래도록 기다릴 수 있습니다.

 

결국 한 평생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교 덕 중의 덕은 겸손입니다. 그냥 능력이 없어서, 머리에 든 것이 없어서 내려서는 겸손이 아니라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내려서는 참 겸손, 생활하는 겸손을 체득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

- 이정배 목사-

 유다 민족들에게 예루살렘은 희망의 상징이자 절망의 나락이었지요. 바빌론 포로(BC 586년) 이후 남의 나라에 종노릇하며 살았으나 예루살렘을 통해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의 예루살렘은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적 불의가 묵인되는 곳이었고 권력자가 백성을 억압하는 현장이었지요. 예수님 당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후견 하에 이스라엘 왕 헤로데가 불의한 권력을 휘둘렀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역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켜 자신의 부를 축적하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예언자들이 소망했던 하느님 나라를 예루살렘에서 이루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니예루살렘으로의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실’로서 공존하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것을 알았음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

그러나 정작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머니까지 동원하며 헛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없이하려한 예루살렘의 허상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된다 한들 예루살렘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물으시지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새 예루살렘을 위해 죽음의 길을 결단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제자들에게 그 길에 동참할 것을 바라며 그들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고쳐주십니다. 크고자 하면 작은 자가 되고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죽임을 당하려 오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면서 말이지요
.
그리스도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이지요. 그러나 그 옛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가 불편해지지는 않는지요?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예수님이 향했던 예루살렘의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고 즉시 첫 번째 수난예고(16,21-23)를 들려주셨다. 그 때 베드로가 스승을 붙들고 이를 말리려다가 부끄러운 질책을 받았다. 갈릴래아 활동기가 마감될 즈음에 두 번째 수난예고(17,22-23)가 있었다. 그 때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고 마태오는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상경길목에서 세 번째 수난예고(20,17-19)를 들려주신 것과 어머니를 동원한 제베대오 형제의 청탁과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이 밝혀지는 내용이다. 이번의 예고는 앞의 두 번보다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님의 동족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게되고, 이스라엘을 지배한 이방인 로마군인들에 의해 조롱과 침 뱉음, 매질과 채찍질을 받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있을 부활 또한 어김없이 예고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만큼 이에 따른 부활의 영광 속에 깃들여 있는 예수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예고이다. 이제 연습은 끝이고 실전(實戰)만 남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수난과 죽음 이전에 제자들이 맞이하는 최고조의 심각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동반하여 분위기를 깨고 있다. 마치 신랑을 빼앗겨 통곡하는 혼인 잔칫집에 와서 축가를 부르는 듯 하다.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21절) 하고 간청하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두 제자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하나 모두 같은 통속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예수님의 간절하고도 처절한 수난예고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앞서 예수께서 추종하는 자에 약속한 상급에 대한 말씀(19,29)만 꽉 들어차 있다.

 

재산이 많은 부자청년이 예수추종을 거부하고 떠나자 베드로가 나서서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7-29)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고, 이에 제자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때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 전에 치러야 할 실전(實戰)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두 제자 어머니의 청을 거절한 것은 제자들 전체의 청을 거절한 것과도 같다. 사실은 예수께서는 이런 종류의 어떠한 청도 들어주실 수 없다. 그분은 이 세상에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28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거절은 곧 초대이다. 이 초대는 사람의 아들과 함께 섬기자는 것이며, 세상을 위하여 함께 아파하고 목숨을 내어놓자는 초대이다. 그러나 이 초대는 진정한 권위에로의 초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권위란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래전 프랑스의 한 젊은이가 눈 덮인 알프스 산을 오르다가 실족하여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고 한참 동안 깨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오두막집 따뜻한 방 안에서 집주인이 정성스럽게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너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 은혜를 꼭 갚고 싶은데 이곳의 주소와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 젊은이는 큰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란 자신의 선행과 공로까지도 겸손하게 숨길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은 오히려 진정한 섬김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남을 섬기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특권을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