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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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1-3.11ㄴ-32) |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하느님께 애원한다. 미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죄를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죄에 빠져 죽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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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과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을 떠나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말해 줍니다. 그의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의 모습처럼 삭발인데, 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동생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는 큰아들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릅니다. 왼손은 크고 강인한 손 모양으로, 세상의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손입니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운 손 모양으로, 아버지가 다 품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품어 주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늙어 버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자비롭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한쪽 눈은 집 나간 아들을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실명 상태입니다. 그러나 눈가에는 분노가 아닌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하루도 그 자식을 잊지 못하고 자식이 떠난 길을 끝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향한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날마다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은 짓물렀습니다. 저 멀리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몰골이 달라진 아들을 아버지는 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아들을 안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춥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고,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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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작은아들은 이 말을 오랫동안 연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없이 내어 줍니다. 작은아들도 놀랐지만, 큰아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섬겼지만’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지 않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손에 쥐자 서둘러 떠납니다. 인사 한마디도 없이, 혹시나 아버지 마음이 변할까 봐 연기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철없는 아들에게 거금을 쥐어 준 것일까요? 가져가면 분명 날려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산이 있는 한,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뜻 주었던 것입니다. 재산보다 아들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판단처럼 아들은 재산을 다 날립니다. 거저 생긴 것이었기에 물 쓰듯 써 버렸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자 고생과 굶주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인생의 눈’을 뜹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실패와 좌절은 곧바로 은총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주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역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셨음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 속에서도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언제나 넉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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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날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누어 줍니다. 유산을 넘보고 있는 한 ‘어떤 말’도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예감은 적중합니다. 작은아들은 겁 없이 탕진해 버립니다. 고생 없이 들어온 재산이 오래갈 리 없었던 것이지요.
재물이 떠나자 사람들도 떠나갔습니다. 갈 곳도, 있을 곳도 없어졌습니다. 작은아들은 처량해집니다. 고독과 패배감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그는 비로소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뛰놀던 집이 그리워집니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고생을 가르칩니다. 결핍의 체험을 통해 겸손과 이해심을 체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신비입니다. 삶과 인생을 ‘다시 보게’ 하는 길잡이입니다. 작은아들 역시 ‘모든 것을 잃었기에’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대했던 모습입니다. 그에게 실패는 분명 ‘은총’이었습니다.
노력 없이 생긴 재물에는 ‘하늘의 힘’이 없습니다. 당연히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재물은 사람을 우습게 봅니다. 재물도 눈과 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재산’이 많습니다. 여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겪는 ‘고통’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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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쉰들러(1908-1974년)는 독일인 사업가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나치에 협력해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그 재산으로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여 천이백여 명의 유다인들을 구해 낸 인물입니다. 그의 이러한 선행이 전설과도 같이 입으로 전해졌지만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구제받은 유다인들의 명단 원본이 발견되자, 오스카의 일생은 단번에 영웅적인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와 독일의 유다인 수용소 소장의 술좌석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오스카가 “선의 극치는 용서입니다.” 하고 수용소 소장에게 말하자, 그는 처음에는 이 말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유다인들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용서를 실천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선을 체험해 보고 싶었던 소장은 이내 다시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전처럼 유다인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맙니다.
수용소 소장이 용서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용서에 대한 체험, 곧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라틴 말 속담처럼, 스스로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손해만 보시는 아버지>
-양승국신부-
돈보스코 성인의 3대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의 전기(피에트로 리날디저, ‘사랑에 강요되어’, 돈보스코 미디어)를 읽고 있습니다.
단 하루라도 리날디 신부님과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더군요.
“정말이지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수도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신학생이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신학생가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리날디 신부님은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의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리날디 신부님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신학생은 다시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는 후에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따뜻한 아버지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부성애,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단어입니다. 사제라면 누구나 따뜻한 부성애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공동체나 단체의 책임자들 역시 수하 사람들에게 부성애를 보여주고 싶을 것입니다. 가정의 아버지들 역시 아이들에게 부성애를 실천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닌 분들, 오늘 복음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복음은 수많은 성서의 비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보통 이 비유를 사람들은 ‘탕자의 비유’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아버지께로 돌아서는 작은아들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아들에 앞서 바라봐야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는 철저하게도 수동형이십니다. 아들에게 늘 손해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때로 무능해보이고,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도 비슷합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미리 챙겨가겠다는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속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확연한 것이었기에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청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유산을 분배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십니다. 작은아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해주십니다.
완벽한 거지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철저한 수동형이십니다.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냐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기쁜 얼굴로 작은아들을 환대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변덕스런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분이십니다. 늘 거기 그대로 서 계십니다. 우리가 떠나갈 때도 그냥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고 마냥 서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그분께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다른 데 가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십니다. 죄구덩이 속에 살아온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있는 힘을 다해서 포옹해주십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하느님은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아버지(루가 15,11-32)
-유광수 신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대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녀를 가슴에 묻습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 나의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품어주시기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집 처지가 밖에 보다도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나 집안에 붙어있던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