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오 18,21―19,1)

2013. 3. 5. 오전 8:27:59

글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19,1)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자 여호수아를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해 주신 것처럼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도 함께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새로운 시대가 그들에게 열리기 시작한다(제1독서).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삶에 베풀어 주신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다.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창세기가 전하는 요셉의 긴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창세 37,1-47.31).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들 손에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마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파라오의 꿈풀이를 해 주면서 당시 온 땅에 밀어 닥친 기근을 다스리는 이집트의 재상으로 곧바로 임명됩니다. 이때 자신을 죽이려다 이집트로 팔아넘긴 자기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찾아옵니다. 다음은 자신의 깊은 상처와 기구한 운명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4-8).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하는 책들도 수없이 나와 있으며,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가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요셉처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것을 당신의 은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내는 순간 요셉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양승국신부-

 용서(容恕)란 단어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인간’,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 ‘짐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인간’으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 ‘인간’이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은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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