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가 11,14-23)
- 말씀의 초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권고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모략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악의적인 행동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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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다.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을 멀리한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도망치려는 완고한 마음이 죄인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하신다고 비난한다. 마음이 뒤틀리고 눈에 색안경을 끼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게 마련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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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으로써 선을 행하지 못한다. 악으로써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없애지 못하고 오직 빛으로써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젠가 목사님 한 분을 초청해 사제 연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복음을 전하려면 그 방법 자체도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0년 전 무렵 개신교에서는 ‘선교왕’이라는 것이 한창 유행했다고 합니다.
선교를 가장 많이 한 사람에게 자동차 같은 고가의 상품을 시상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효과가 꽤 있는 듯 보였으나, 갈수록 점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방법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이 유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복음화를 이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때에도, 악을 이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다.”는 서양의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를 이루는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악의적이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힘’이 아니라 ‘강력한 사랑’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선한 마음과 선한 방법을 통해 선한 결과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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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말못하는 어떤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로 받아들여야 할 장면입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별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기에 그런 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그들의 불손을 이해하며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엇이든 좋게 생각하면 ‘좋은 판단’을 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생각을 ‘먼저’ 하기에 이상한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힘센 자가 자기 집을 지키더라도 ‘더 힘센’ 자가 덤벼들면 당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보다 더 힘센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늘 선한 생각이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면 ‘곧바로’ 선한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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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몰아내십니다. 그분의 권능을 보고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탄의 힘을 빌려 그들을 쫓아낸다고 소문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분이었습니다.
민중은 기적을 믿고 따르는데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백성들을 지도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의 위에 서려는 사람에게는 영적 활동이 제대로 보일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영적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힘을 잠시라도 허용해 준 이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모습을 몰랐기에 지도자들은 곡해하였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는 인물로 착각하였습니다. 평소 예수님을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의 생??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탄에 대한 평소의 생각은 무엇인지요? 두려움과 막연한 무서움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어떤 세력도 무너뜨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어떤 악의 힘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천국에 사는 아이>
세례를 준비하고 있는 한 친구가 슬며시 제게 다가와 묻습니다. "사회에서 살 때 저질렀던 건수가 엄청 많은데...세례 받으면 다 용서해주시나요?
"어떤 사고를 쳤는데?"라는 제 물음에 아이는 그간 저질렀던 건수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았습니다. 미안해하면서도 아이는 자신이 친 사고들이 절대로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생계유지형", "목숨부지형" 건수들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은데,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서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이 참으로 기특해 보였습니다.
새출발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참으로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하는 짓이 너무도 제 마음에 들었던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한테 솔직히 고백한 이상 이미 네 죄를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주셨을 것으로 확신한단다. 이제 더 이상의 방황은 없는거다."
환해진 아이의 표정에 제 마음이 너무나 흐뭇해졌습니다. 뉘우침과 화해, 용서와 사랑이 있는 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과연 어떤 곳이겠는가? 자주 생각해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그런 곳이 결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우리 사는 모습의 연장선상에 천국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영혼이 지난 삶의 아픔을 접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그 출발선상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시(常時)로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 언제나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비록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이 계시기에 부단히 희망하고 기쁘게 견뎌내는 한 소박한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천국이리라 믿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을 떨쳐버리고 진정한 하느님, 참 하느님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곳이야말로 천국입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우주의 하느님이시자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조심조심 경건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살리시고 자비로 감싸주시는 연민의 하느님 앞에 감사를 드리며 그 극진한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그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
-김성웅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도 오히려 적대자들의 반감과 의심에 부딪히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 반대와 갈등을 수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역시 예수님이 처했던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어쨌거나’ 하느님께 항구히 충실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주 완고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이 친절히 대하면 그들은 의심에 사로잡혀 불순한 동기를 캐물을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친절히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공을 거두면 거기에는 반드시 불신하는 동료나 적대자들이 따릅니다.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실하고 성실한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여러분을 속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진실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몇 년 동안 공들여 뭔가를 세웠건만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허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다시 세우십시오. 여러분이 평안함과 행복을 발견하면 누군가가 질투할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기뻐하십시오. 오늘 행한 선은 이내 잊히고 말 것입니다.
어쨌거나 선을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최선의 것을 내어주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최선의 것을 내어주십시오. 결국은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이지 여러분과 사람들 사이의 문제가 아닌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
-최성기 신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에는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이 하느님에게 숨결을 받는 순간을 두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당시 유명했던 기도문 ‘창조주여, 오소서(Veni Creator)’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기도문에서 하느님 창조의 숨결을 하느님의 오른손가락으로(Tu, digitus Paternae dexterae)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작품이 그렇듯이 미켈란젤로의 하느님 손가락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명을 시작하는 데 하느님의 어루만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어루만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러러 당신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하느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까닭은 우리한테도 이 세상을 어루만지고, 이웃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과 우리는 ‘손가락이 닮은’ 사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만지고 보듬어 줄 능력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을 포옹할 힘이 있다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닮은 점이 아닐까?
밖에서 다쳐 돌아온 아이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실의에 빠진 동료의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에서, 아픔에 지친 환자에게 다가가 지그시 손 잡아주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웃을 안아주면서 우리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 사람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리는 창조의 숨결이 짧은 어루만짐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세상의 악을 몰아냈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루만지신 그 손가락이 우리 편이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하루, 어루만짐이 많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상처로 어두워진 마음, 분노와 미움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를 보듬어 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하자. “주 우리 하느님,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공동번역 시편 90,17).
내 편에 서지 않는 자
조창현 제피리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치유해주십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과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오히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없앴다고 하거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두목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귀는 하느님의 나라를 반대하고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동료인 마귀들을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또한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치유하는 기적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표징으로 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마저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마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 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하느님께 멀어져만 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시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기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도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지금 우리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선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는 시편의 말씀을 우리는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다. 우리의 편협한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있을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안으로 오셔서 활동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그렇게 우리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것입니다.우리도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우리의 생각안에 하느님을 가두어 놓고 생활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한 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답니다.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의 눈에 들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영적인 사람.
조재형가브리엘신부
예전에 김구 선생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국의 통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통일된 조국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조국의 통일입니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을 하였고,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꿈꾸었던 김구 선생님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저 역시 생각을 해 봅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드는 나라,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는 정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회입니다. 분단된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터서 정치, 군사적인 체제는 유지하더라도 경제, 문화, 예술의 분야에서는 서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북은 더 이상 핵무장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남쪽 또한 북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민족의 미래와 발전을 위한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꿈은 누가 대신해서 이루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함께 연대할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공하는 일곱 가지 습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꼭 필요한 습관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 「거룩」해지는 것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 「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 영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느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습니다.
넷째,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압니다.
다섯째, 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여섯째, 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일곱째, 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습관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