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고향에서는 (루가 4,24ㄴ-30)

2013. 3. 4. 오전 7:04:24

글자

2013년 3월 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가 4,24-30)




 

말씀의 초대

아람의 장수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다. 그는 엘리사 예언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이스라엘로 갔다.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어처구니없었지만, 그가 일러 준 대로 하자 병이 나았다. 이에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온 누리의 주님으로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신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진 점을 상기시키시며 은총이 지연이나 혈연에 따라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도에 따라 주어진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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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아닌 아람의 장수 나아만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내적인 조건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신자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외적인 조건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요?
이솝 우화 중에 ‘요술쟁이와 생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는데 고양이를 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가 불쌍하여 고양이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술쟁이는 생쥐를 다시 개로 변화시켜 주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였습니다. 요술쟁이는 다시 호랑이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된 생쥐가 고양이를 만나자 오줌을 싸면서 숨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요술쟁이는 “네가 모양(껍데기)만 바뀌었지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구나. 다시 생쥐로 돌아가려무나.” 하면서 생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비신앙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겉모습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까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조건만으로 하느님께 은혜를 얻고자 하였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갖추어야 할 내적인 변화는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환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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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자렛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사제도 아니신 분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희년을 선포하시고, 선포하신 희년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고향 사람이며,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그들의 고향에서 겪은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면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끌어내어, 산의 벼랑까지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합니다.
열등감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허영이나 교만에 빠지기 쉬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고, 때로는 자기가 높아지려 노력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추락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고향 사람들도 이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면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기쁨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이 매우 좋아 보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환영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거기에 참된 기쁨도 숨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편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요셉의 아들이며, 직업도 평범한목수였다는 편견입니다. 그들은 우월감에 젖어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형태로 마음을 닫고있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편견을 깨려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위대한 엘리야 예언자도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녀는 시돈 지방에 사는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시돈 지방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아 유다인들은 대단히 부정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깨끗하다는 유다인들을 제쳐 두고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편견의 우월감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
고향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사렙타의 이방인 과부도 엘리야 예언자를 맞이했는데, 어찌하여 당신을 외면하느냐는 질책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조용히 피신하십니다. 어리석음도, 난폭함도 참아 내십니다. 살다 보면 지난 일을 들추어내는사람들을 꼭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복음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단순한 길

-전영준 신부-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느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간혹 나는 신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천국에 바로 가는 티켓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알고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라고 질문하곤 한다. 이때 열이면 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방법을 듣고 난 다음에는 절망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오늘부터 죽는 날까지 잠들기 전에 단 하루도 빠지지 말고 성경을 한 장씩만이라도 읽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한 장 읽는 일은 쉬운 일이겠지만, 죽는 날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아주 어려워 보이는 희생과 봉사를 몇 가지 실천하라면 이를 악물고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의 나병 치유 처방을 듣고 몹시 화를 내며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나아만의 부하들이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2열왕 5,13) 하며 설득했다. 아마 복음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일화를 언급하신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길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자. 어쩌면 구원의 길은 우리 가까이에 이미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구원의 길을 찾아보도록 하자.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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