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0)
who do you say that I am?

말씀의 초대
진정한 관리는 주님의 보호이다. 그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의 자리는 길이 보전될 것이다. 사람이 주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권력은 영원할 것이다. 사람 눈에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주님 앞에 의로운 자로 살려고 애써야 한다(제1독서).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깊다. 그분의 판단은 헤아리기 어렵다. 누가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 철저한 신뢰와 믿음만이 그분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여론엔 별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의 관심은 제자들의 믿음이다. 베드로는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다. 예수님의 깊은 배려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떤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빛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다음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에서 일등을 하고 싶어 하니 노력을 안 했는데도 일등을 하였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각만 해도 생겼습니다.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이상하게 그의 마음은 점점 허전해지고 우울해졌습니다. 그가 다시 주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생겼지만 늘 공허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했더니, 주님께서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을 해 보아라. 그러면 너는 삶이 보람 있고 행복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닐 기유메트가 쓴 『독수리 날개에 태워』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것은 우리 삶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실천하며 살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전하는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적 삶을 살 때 하늘 나라가 열립니다. 그래서 이 열쇠는 곧 십자가 모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하듯, 우리 삶의 의미를 주님 십자가의 열쇠로 풀어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없으면 하늘 나라는 열리지 않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언자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에 스승님께서는 별 반응이 없으십니다. 세상의 판단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답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하늘의 아버지시다. 너에게 축복이 있기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아무나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란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인’이란 의미입니다.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입니까? 아니면 우주입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먼저 나 자신과 연관된 세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책임질 사람이 있고, 내 소유와 미래가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세주라는 고백은 엄청난 신앙 행위입니다. 누구나 입술로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승복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님을 만나야 승복이 가능해집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이렇게 고백한다면 그분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고해성사의 은총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자체 이시기에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당신 자녀로 불러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으로 잃어버리는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며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고해성사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회개에로 인도해 주시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당신도 예전에는 성당에 나갔는데 지금은 예수교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교 다니니까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하느님과 직접 통하니까 좋더라.’ 하시면서 꼭 신부를 통해서 용서를 청해야 하느냐?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20장22절 이하 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독대하고 싶어 하며 답답해했지만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혼자서 회개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하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는 단순히 인간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네 속을 내 앞에 털어 놓아라”(이사43,25-26).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는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디도2,14).
이사야서1장18절에는“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적고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는 세례은총을 지속시켜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해 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집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을 유지함으로써 늘 은총의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분의 귀한 도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될 것입니다.(2티모 2,21).
그리고 고해성사는 교회공동체를 살아나게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도 살려 주지만 용서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를 통해 마음이 거룩해 지는데 그 공동체가, 그 가정이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했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는 데 거기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1)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살펴야지요.
어떻게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 ….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범하는 잘못은 그 원인을 잘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세심해서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살펴본다면 남을 흉보거나 험담한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침묵한 것도 잘못입니다. 남을 위해 이로운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는 일을 찾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특별히 입을 조심하지 못한 사항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2)통회(뉘우침);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요엘2,13).
3)정개 (결심); 다시는 이탈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속담에는 “정개의 징검다리를 건너 지옥 문 앞에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고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까 어느새 지옥 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고, 남의 탓만 한답니다.
4)고백; 알아낸 잘못을 말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감추는 것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행해지는 성사인 만큼 두려워 말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의 횟수, 상황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탓을 돌리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죄만 고백하십시오. 고해의 비밀은 2천년 교회의 역사가 보증합니다.
5)보속; 보속은 일종의 영적인 형벌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꼭 이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래의 죄에 대해서 보호해 주고 나머지 죄를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선행,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를 완성합니다.
물질의 손해를 끼쳤으면 보상해야지요. 가끔 어떤 분들은 잘못에 비해서, 보속이 너무 작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에도 그분의 사랑이 있고 그분의 넘치는 자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에 대한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또한 죄책감으로 움추러 들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유를 줍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36,24-28).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주님의 물음은 당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만큼은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한 없이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고해소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시 한편 읽어드리겠습니다.
고해소를 나오며 -장정애-
참 알 수 없는 당신의 저울
그 한 가슴의 사랑과
수 많은 유다를
한 몫에 매기시더니
오늘
송곳 같은 나의 죄와
성모송 한 번을
같은 추에 두시다니
사랑합니다.
클릭
천국의 열쇠를 차지하는 행복
-최인각신부-
천국 열쇠
누군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는 행운의 열쇠’를 나에게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있고, 되고 싶은 것을 다 이룰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신분이 바뀌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열쇠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음이 복음서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는 도망까지 갑니다.
이는 우리와 같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 주위의 이웃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보고,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보기는 더욱 쉽지 않습니다.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의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신부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거듭 실패하는 삶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화목과 사랑을 위해 충실한 하느님의 사제로 묵묵히 살아갑니다. 치셤 신부는 양심의 가책(呵責)을 받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질 것이라 확신하고,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를 귀하게 여깁니다. 한편, 그의 동료 안셀모 밀리는 약삭빠르게 행동하고 요령을 부리며 출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습니다. 밀리는 입으로는 하느님과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인간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보다는 세상 권세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소설 속의 그는 인간적인 영예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천국의 열쇠를 획득하는 삶과는 무관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라우렌시오 성인이 기억났습니다. 285년경에 순교한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제국의 박해시기에 교황님을 돕는 부제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성인에게 ‘교회의 보물’을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한 후, 교회의 보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3일 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황제 앞에 나아와,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성인을 화형에 처하였지만, 성인은 이를 용감하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교회의 보물로 여길 줄 아는 성인이야말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천국의 열쇠를 차지한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산과 권력을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높은 인격을 잘 드러낼 수도 있지만, 저질 인격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간직하면서도 가련하고 불쌍한 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본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불쌍한 이들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겸손하게 무릎 꿇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분께 신앙을 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국의 열쇠를 차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도 바쁜 일상이지만, 『천국의 열쇠』를 다시금 읽으며 또 다른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경배하렵니다. 여러분을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천국의 열쇠가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찬근신부-
예수님이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참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주님, 주님’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맹신(盲信)’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따라 신앙인의 유형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유형은 자기 과신형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 누구보다 항상 잘할 수 있다고 나서면서 그 어려운 대통령 자리도 바로 자기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무모한 유형입니다. 결국은 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도 이름뿐이며 혹 필요하다면 자기 비서 정도로 여깁니다.
둘째 유형은 자기 비하형인데 문제가 더 큽니다.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김으로써 책임과 의무도 작게하는 소심한 유형입니다. 늘 익명 속에 안주하고 중립을 선호하는 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자기를 숨기고, 자기 삶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걸림돌이고 두려운 심판자입니다.
셋째 유형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는 겸손한 유형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제대로 압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충실히 살아가는이 사람에게 하느님은 고향이며, 목적이며, 구원입니다.
우리는 어느 유형의 신앙인입니까?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위의 유형들을 다 거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팔뚝과 그물과 배만을 믿고 살던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분이 두려워 자기에게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영광스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 고백이 끝나자마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과 수난을 예고하시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리다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라는 욕을 먹습니다. 어떤 높은 산에서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초막을 짓고 눌러앉아 살자고 조르다 망신당하고, 한번은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폭력을 휘둘러 사람의 귀를 잘랐다가 야단맞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한 그날 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느님께 맹세까지 합니다. 엉엉 울며 후회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세 번씩이나 사랑다짐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이런무지와 오해, 회의와 갈등의 여정이 끝나고 나서야 베드
로 사도는 비로소 진정한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울고 웃고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성숙되어 갔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믿음도 부족하고, 실천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늘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세상의 어려움과 신앙의 갈등을 겪어낸다면, 언젠가는 하늘나라 열쇠를 손에 쥐고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마태 16,1320은 예수님 공생활의 전환점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에 대해 물으시고, 이후 제자들에게 당신이 가셔야 할 메시아의 길에 대해 드러내 놓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1.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살아 있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물음에서 당신의 정체를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분, 영광스러운 인물입니다.(다니 7,13 이하 참조)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으로 대답한 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답변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과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동의어인데,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가리킵니다. ‘메시아’를 ‘하느님의 아드님’과 같게 여기는 것은 구약성경의 배경에 비추어 보면 놀랍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몇몇 경우에, 이 칭호가 단지 ‘메시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를 단순히 이스라엘의 메시아에만 제한하지 않고, 하느님과 그 아드님 예수의 특별하고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이상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들에게 경배받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말미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라고 했던 고백은, 비록 그가 이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의 완전한 계시에 비추어, 독자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을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아버지처럼 신성한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경배를 받는 분이십니다.
2.“너는 베드로이다….”
예수님은 장엄하게 베드로의 고백을 긍정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의 특징은 세 가지 단어 ‘반석’, ‘열쇠’, ‘매고 풀다’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여기서 ‘반석’은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의 ‘말’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사 51,12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백성이 떨어져 나온 반석으로 간주되는데, 아마도 오늘 복음에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의 역할을 이해하는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열쇠의 기능은 열고 잠그는 것인데, ‘열쇠’는 성경에서 어느 분야에서든지 권위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이 통과하는 터널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자이신 스승을 따르는 베드로의 행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계속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것’, 곧 다스릴 권한을 주십니다. 복음서에서 매고 푼다는 것은 죄의 용서와 거부, 올바르거나 잘못된 가르침을 포함하여 허용되거나 금지된 행위에 대한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진실로 믿지 않아서도 아니고,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사명을 정치적인 것으로 오해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다 전통에서 메시아는 왕으로 다스리고, 그의 주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사적 힘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칼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성경의 인물 가운데 베드로는 가장 구체적으로 신앙의 여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지만(16,1320), 수난 중에 예수님을 부인하고(26,69-75), 부활 후에는 사랑을 고백합니다(요한 21,17).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첫 체험, 신앙고백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첫 마음으로 초대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하고 다시 질문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Oratio)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합니다. 신들 앞에서 당신께 찬미노래 부릅니다.(시편 138,1)

말과 실행
-이연수-
말을 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면서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때, 말한 사람을 신뢰하기는 힘들지요.
반대로, 별말 없었는데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 어느 날 행동으로 보여 줄
때는, 이런 사람이었네 하며 믿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회당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만 했나 봅니다. 그런 말은 힘이 없고 설득력이 없지요. 공허할 뿐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고 하신 예수님과 달리,
저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기까지
합니다(사도 15,10 참조).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613가지나 되는
유다교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정결법도 따라야 하며, 금기 식품은 가려내어 먹지 말아야 하지요. 이처럼 너무나 까다롭고 철저한
유다교의 율법과 관습을 일반 백성이 일일이 지키기란 참으로 버거울 뿐입니다.
정말 무거운 돌덩이 하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꼴이었겠지요.
그런데도 저들은 계명만 지키도록 강요할 뿐 도와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만 일삼는 저들을 절대로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소속이 불분명해서 죽음을 맞이한 이 농부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도 소속이 불분명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굳게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것들에 무게를 더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선택하겠다고 다짐을 했다면, 이 세상 것들을 하나씩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 세상 것들을 꼭 움켜잡고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는 결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총 250Km의 거리였지요. 그런데 이번 자전거 여행에서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저의 짐이었습니다. 3박 4일 동안 필요할 것이라고 그래서 날 편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져갔던 짐들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 짐의 무게 때문에 여행이 힘들었지요.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짐 정리를 하는데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3박 4일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물건처럼 보였지요. 그래서 짐을 많이 가져가면 힘들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물건을 가방 안에 넣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필요 없는 물건들을 힘들게 짊어지고 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정작 중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다 필요한 것 같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스스로 힘들어 지쳐했던 것은 아닌가요?
주님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내게 꼭 필요한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나를 힘들게 하는 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 소속이라는 결심을 굳게 설 때, 우리들은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하시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묻지요. 이에 제자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데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는 말을 전해 드립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평이 무척이나 좋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을 하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답을 말해서일까요?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편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을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큰 은총의 선물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도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에 서야 하며, 세상의 것들을 짊어지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짊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편에 서는 내가 될 것을 다짐하도록 합시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사는 삶
-배광하신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하느님께 한결 같았던 다윗왕과는 달리 그의 아들 솔로몬은 말년에 온갖 잡신 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1열왕 11, 4~5)
솔로몬이 따랐던 대표적 우상만을 성경이 지적한 것이지, 실제로는 왕궁 안에 온갖 우상들이 득실거렸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정략결혼을 한 아내들이 가져온 신들을 섬겼는데, 그의 아내가 칠백 명, 후궁이 삼백 명이나 됐기 때문에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주님의 진노를 사게 되고 결국 나라는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이 애써 이룩한 터전 위에 평화와 번영과 축복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하느님께 향한 믿음만 고백하고 삶으로 참된 신앙을 살지 못한 죄가 크나큰 재앙을 불러온 것입니다.
똑같은 예를 우리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필리핀은 분명 6.25 전쟁 전에는 우리나라보다 경제가 나았던, 잘 사는 국가였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난 필리핀 국민은 오늘날까지 설움 속에 비참한 가난을 살고 있습니다.
그 같은 비극의 중심에는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있습니다. 온갖 사치와 허영의 상징인 이멜다의 이야기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저주와 농락의 대상입니다.
그는 분명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몰락의 말년에는 온갖 잡신을 다 섬깁니다. 솔로몬의 말년과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실상 삶에서는 권력과 탐욕의 우상에 빠져 자신도, 백성들도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만든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또다시 인도의 간디가 말했던 따가운 질책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이면에는 고백하는 믿음대로 따르겠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악마들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한 만큼,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 했던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는 이같이 외쳤습니다.
“싸구려 은총이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은총이 싸구려 행상인의 물건인 양 시장에서 팔리고, 죄의 용서라는 것도 할인된 가격으로 내다 팔리고, 가치 없는 은총, 노력 없이 은총만을…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는 죄를 손쉽게 은폐해버린다.”
세속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못하게 살면서, 한 발을 신앙에 담가 놓았다고 은총의 구원을 받으리라 착각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질책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까닭은 분명 당신의 삶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닮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교회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될 것이며, 그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대로 반석 위에 세워져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과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육화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근심하시며 인간과 역사를 만들어 가실 만큼 당신을 낮추시고 작게 만드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그 그릇이자 주님께서 주신 특권이 표현된 장소가 교회임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생활화하고 자기화하며,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공동체적 삶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특권인 교회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분명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이기양 신부-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래, 나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단다.
너도 내가 만난 하느님을 알게 되기 바란다."
한 초등학생과 저와의 어느 날의 대화 한 토막입니다.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가로막던 청년시절, 신부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신학생으로 산 지가 7년이 지났는데도 성직자로서 평생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간 방황의 시간을 뒤로하고 대학원으로 복학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제품을 위한 피정이 시작됐습니다. 성직의 길을 가든지 아니면 그 길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오든지 결정을 내려야 했던 30일간 침묵피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까지 기도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기본 시간 외에 하루에 6~7시간씩 매일 무릎 꿇고 저의 길을 알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18일이 지나자 무릎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피정을 할 수가 없었고 큰 수술을 앞두게 됐습니다. 그 정도 노력을 했으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래에 대한 결정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끝까지 피정을 마쳐야 한다는 지도신부에게는 가시 돋친 말밖에는 안 나왔습니다.
이렇게 혼란 속에 반항하면서 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구절이 환히 비치면서 하느님의 현존이 순간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필름이 한꺼번에 돌아가듯이 나의 지나온 인생이 처음부터 펼쳐지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고 쏟아졌습니다. 방황하고 다녔던 지난 모든 순간순간이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한 순간도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나온 삶의 여정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느님 앞에 내가 너무나 큰 죄인이라는 것이 절절히 느껴지면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길은 명백해졌고, 과거의 불안과 어둠은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는 말씀을 늘 마음 깊이 새겨 넣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제 삶을 끌어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 순간 모든 것이 깨달아지며 퉁퉁 부어서 수술 날짜를 잡았던 무릎의 상처 또한 놀랍게도 자연 치료가 되어 지금까지도 수술 한 번 안 하고 잘 다니고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은총과 성숙의 시간이었음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주님은 저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면 그때의 체험을 되새기면서 다시 정화의 길, 그리고 성숙의 계기로 삼곤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제자의 답변에 기뻐하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때부터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굳게 자리 잡게 됩니다. 예수님께 충성도 하고 배반도 하며 회개와 순교의 삶을 이어간 베드로를 있게 한 힘은 바로 오늘의 체험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체험이 저에게 이어졌고 저 역시 여러분에게 주님은 살아계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베드로 사도가 체험했고 바오로 사도가 체험했으며 또 제가 체험했던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는 순간 여러분이 있는 그 공간은 영원으로 열리며 바로 하늘나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김영수 신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신앙의 기초
언젠가 온 나라가 도청사건으로 떠들썩한 적이 있습니다. 숨어서 몰래 엿들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남의 비밀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권력이나 조직일수록 비밀스런 감시와 철저한 통제로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합니다.
그러한 비밀스런 권력은 마치 고인 물과 같아서 스스로 고립되어 썩게 되고 마침내는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왕의 시종장으로서 권력을 잡았던 셉나가 하느님의 뜻에 기초를 두지 않고 인간적인 꾀와 술수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듯이 신앙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기초를 삼으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야할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기 위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이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당신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물어보신 다음,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답한 예수님은 사뭇 다른 차원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아드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위에 교회가 서있습니다. 교회가 이 신앙고백 위에 서 있지 않으면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를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시고 죽음의 힘도 감히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이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하거나, 인간적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위에 굳건히 서서 인간의 마지막 한계까지도 극복하면서 끝까지 주님께 나아가야한다는 당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세상 끝 날까지 그 사랑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열쇠는 엘리아킴이 받았던 열쇠 보다 훨씬 중요한 하늘나라의 열쇠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한 열쇠입니다. 그 열쇠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 열쇠의 주인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열쇠를 맡은 사람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열쇠의 주인인 것처럼 그 열쇠를 독점하고 자신의 권력으로 착각한다면 셉나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사람이 가르쳐준 내용에 머문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에게도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 들고 마침내는 하느님 마저도 상품화하고 거래하려드는 세속적 신앙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우러납니다. 내 이웃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 고통 받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아들을 만나는 체험,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위에 세워진 신앙만이 인간적인 유혹과 두려움을 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지금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며 교회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때 세상도 우리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요와 지혜와 지식의 심오함에 맛들이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풍성하고 지혜롭고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 속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