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화요일(마태오23,23-26)눈먼 인도자들

2011. 8. 23. 오전 7: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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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3일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마태오23,23-26)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온갖 핍박을 견디어 냅니다.”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는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선교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그들의 진심이 사람들을 움직였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눈이 멀었다.’고 하신다. 접시의 겉은 닦으면서, 속은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속과 겉이 다르기에 위선이다. 겉모습은 경건하지만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꾸중이다. 무서운 질책이다
 

오늘의 묵상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심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무엇이 그분의 질책을 듣게 하는지요? 위선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듯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안과 밖이 다르면 언제라도 꾸중을 듣기 마련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조신(操身)했습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부정’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민중과 분리되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더러는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이웃을 멸시하였습니다.
율법의 근본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본질이건만 엉뚱한 것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켜도 사랑이 없으면 강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주님께서 원하실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해악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에서 명하는 부정’에서 벗어나려고만 애를 썼습니다. 진정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중성, 곧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원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이 양면성은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을 지닌 채 태어납니다. 인간의 운명인 한편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 한계성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다가도 미워하고, 질투하다가도 존경하기도 합니다.
위선도 이중성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 사회 어디를 가도 위선을 만납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때로는 위선보다 더한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만은 이 위선을 벗어야 합니다.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은총의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에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면이 없는지, 곧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처신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곰곰이 살펴보도록 합시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 기차 여행을 할 때입니다, 차창 밖에 농촌 풍경이 나타나고 저녁을 준비하는 듯 어느 집 글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그 집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나도 저기서 그냥 평범한 가장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했다지요, 우리 나라의 가장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이며 정신적 스승으로서 혼자서 참고 이겨 내야 할 외로움과 삶의 무게가 노무도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특별히 언행일치라는 것이 누구보다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르치는 종교적 이상과 자신이 사는 현실의 삶 사이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 처럼 이중적이거나 위선적 행동을 하기 쉽슴니다, 때로는 자신이 아는 것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김수한 추기경을 존경하는 것은 그분이 가진 겸손함 때문입니다, 위선적인 행동과 거짓 권위로 사회에서 존경받으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살지 못한 "바보" 임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그분은 우리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꾸짓으신 것은, 그들의 종교적 독성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가르침과 삶을 일치해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주님과 이웃에게 겸손하게 고백하며 살 줄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습니다. 평소보다 빨리 걷는 것을 보니 정말 훔친 것 같았습니다. 얼굴을 봐도 훔친 것 같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더욱 훔쳐간 것 같았습니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슬쩍해 간’ 사람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골짜기를 지나다가 잃었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그제야 나무를 자르면서 바위 밑에 숨겨 두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튿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작과 태도는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이 마음을 바꾼다고 했습니다. 좋은 생각은 마음을 밝게 하지만, 나쁜 생각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똑같은 사람이 ‘달리 보인 것’은 마음의 작용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마음의 깨끗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에는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함께 바쳐야 할 정성은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겉모습보다 속마음을 소중히 하라고 하십니다. 사는 것이 복잡하면 먼저 마음을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삶 역시’ 고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도 밝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 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따라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시편101,2).사랑합니다.

 
 
 † 불행선언 4,5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3번의 불행선언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의 사물에 시선을 너무 오래 고정시키면 주위의 다른 사물은 보이지 않게 마련이며, 설사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다 하더라도 첫 사물에 대한 잔상(殘像)이 제법 오래 남게 된다. 이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의미를 연구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고, 율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율법시행의 "정확함과 명료함"이 덕행(德行)이었다.

네 번째의 불행선언은 십일조 규정에 관한 것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십일조의 규정은 실로 복잡하다. 유다교에서 십일조의 규정은 일년의 모든 수확 중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에게 바치고, 레위인들 또한 십일조 전체에서 야훼의 몫을 떼어 아론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다.(민수 18,25-32) 처음에는 십일조의 품목이 올리브기름, 포도주, 곡식에 한정되었으나(민수 18,12), 나무의 열매와 가축까지(레위 27,30-34; 신명 14,22-23) 그 징세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십일조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켜 음식의 양념향신료로 쓰이는 박하, 회향, 근채에까지 적용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율사들이 얼마나 법의 자구(字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징수하느냐는 것보다 왜 십일조를 바쳐야하는 것이다. 모세는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모든 것을 삼 년마다 한번씩 다 내어놓고 성안에 사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도록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 14,28-29; 26,12-13)

그러나 율사들은 십일조의 목적보다 시행과정을 더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그러니 십일조의 계율보다 더 상위에 자리한 정의, 자비, 신의의 계명이 홀대를 받은 셈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하루살이와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제일 큰 동물로 간주되던 낙타에 비유하신 것이다.(24절)

다섯 번째 불행선언은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것이다.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규정도 다른 율법 못지 않게 복잡하다. 모세오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를 규정하고 있다.(레위 11-18장; 민수 5,1-4; 19,1-22) 그러나 모든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정의 근본정신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는 것이다.

즉 율법의 목적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즉 겉과 속을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물의 겉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속이 시커멓게 더러우면 겉의 깨끗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앉은 착취와 탐욕을 질타하신다.(25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되돌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모든 것에는 비단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시간, 사랑, 능력 등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바치는 것보다 왜 바쳐야 하는 것인지를 늘 묵상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에 있어서도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그 마음이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이다........◆

거짓과 위선     

-박대남 신부-

 

지난 5월과 6월에 폭풍과 같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현 정권의 잘못을
온 나라의 상아탑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성직자와 국민들이 지적했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은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모든 이의 목소리를 거부했습니다. 한때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현장에서 성직자들의 기도와 염원을
공권력의 발길질로 짓밟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짓과 위선에 가득찬 이들의
모습은 과연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거짓과 위선에 가득찬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거룩한 예수님의 입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에 아름다움이 아니라 질책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참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이들은 불행하다고….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요? 불행한가요?
지금 나를 보며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너의 잔에 채워야 할 것

-한은주-

 

오늘 복음에서 시골 출신의 한미한 청년 예수가높으신 양반들에게 쓴소리를 던지신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너희 마음에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없다.” 그분이 기득권자들은 갖지 않았다고 단정하시는 의로움·자비·신의는 어떤 가치일까?
의로움(정의, judgement). 역사가 흘러오면서정의의 개념에도 변화가 있었다. 최근 주목받는 것이 미국의 철학자 롤스의공정으로서의 정의. 그는 개인의 재능과 능력은 우연히 복권에서 추첨된 것처럼 행운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 단정한다. 이런 능력은 사회의 공동 자산이므로 덜한 능력을 가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세금을 내는 것이 이 정의가 현실화된 일부 예이다.
자비(mercy).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똑같은 햇빛과 비를 주신다.(마태 5,
?45) 그분의 자비는 젖먹이를 잊지 못하는 어미의 그것만큼 애틋한 마음이시다.(이사 49,?15) 4대강 발전 계획 때문에 온 국토가 몸살을 앓을지도 모른다. 향후 50년 후면 지구상의 종() 4분의 1이 멸종된다고도 한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파괴되는 생태계를 건지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비심을 회복해야 한다.
신의(fidelity). 사전적 의미로 약속이나 의무를 엄수하는 것, 사람이나 조직이나 신념에 대해 충실한 것을 말한다. 신의가 깨지면 결혼도 우정도 연인 사이도 깨진다.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신의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가 지출이 15퍼센트 늘었는데도 복지 예산은 오히려 줄었다는 기사를 듣고 좀 속이 상한다. 우리 사회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높으신 양반들이 자신의 잔을 깨끗이 씻고 정의·자비·신의의 가치를 가득 채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자들이 좀 더 용기를 얻고 살 수 있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흘러넘치는 사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신의로 똘똘 뭉쳐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할수록 불쌍한 사람들
-양승국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생각할수록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 주변을 정탐합니다.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그들의 본업처럼 여겨집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밥 먹듯이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당합니다. 때로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독설도 듣습니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생각할수록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열두제자 못지않게 복음서 안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 못지않게 자주 예수님을 만났었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도중 때로 깊이 서로를 공감했는가 하면 때로 의견이나 논??평행선을 달려 적대감에 치를 떨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 주변에서 지내면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만났었고 주의 깊게 예수님을 관찰하면서 예수님과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 너무나도 새로우신 분,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기에 마음깊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완고했기에 예수님께서 파고드실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목전에 두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삶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은 제발 좀 정신들 차리라고 신랄하게, 아주 강도 높게, 아주 구체적인 예까지 하나하나 들어가며 자존심 상하는 말을 그들에게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릇된 삶을 반드시 개선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독설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그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절대로 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왜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장황한 질책을 낱낱이 빠트리지 않고 소개하고 있고, 그들을 고발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층 인사들, 가르치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또 형제 안에서, 스승 안에서, 선배들 안에서, 교회 안에서, 또 우리 자신들 안에서 많은 것들을 봅니다. 좋은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보고, 적당한 것도 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은 보고 배우고 따라가되, 어떤 모습은 보아도 보지 않은 척 해야 할 것이며,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식별력입니다.
 
식별의 영원한 기준은 복음적 기준입니다.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의식을 지닌다면 복음적 식별력을 지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일상 안에서, 또 형제들 안에서, 내 안에서 반드시 반 복음적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수시로 식별해나가려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 같은 경우, 장 전체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경한 경고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3장 전체에 걸쳐 신랄하게 지적하고 고발하고 호통을 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그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야단만 맞고 있을 것입니까?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질타 이면에 깃들어있는 예수님의 의도, 마음을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실,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 참 신앙인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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