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오 19,23-30 )
말씀의 초대
기드온이 주님의 천사를 통해 판관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기드온이 자신의 연약한 처지를 아뢰자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하고 장엄하게 선포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책임자들을 부르실 때 주로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부르신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이들을 통해 백성을 이끄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신다. 그만큼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온 마음을 쏟으며, 주님께 마음을 두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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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똑같은 한자를 앞뒤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그 뜻은 참 다릅니다. 출가는 어떤 큰 뜻을 목적으로 하여 집을 떠나는 것이고, 가출은 다만 집을 나가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출가는 내적 자유를 위해 세속적인 인연과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집을 떠나는 것이기에 종교적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가출은 어떤 짐이나 문제를 벗어 버리려고 집을 나가는 것이기에 도피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출가는 단순히 살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붙잡혀 있는 곳을 향하여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에서도 어느 순간 또 다른 집을 짓고 그곳에 안주하고 싶은 순간이 옵니다. 살던 집은 떠났지만 어딘가에 다시 집을 짓고 거기서 머무르려는 순간부터 출가는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출가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입니다.
출가는 단 한 번 ‘집’〔家〕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집’(執)에서,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그저 가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실 제자들의 출가는 그들의 집을 나왔을 때가 아니라, 주님 부활 이후 그 진리에 온전히 투신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굳이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치대로 산다면 그는 출가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집을 떠나 있어도 세상 것에 대한 온갖 번뇌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는 가출한 사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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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다고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는 만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물에 감사할 줄 모르면 부자 대열에 들 수 없습니다.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첫자리’에 재물을 두고 늘 따라다닙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입니다.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에 비유되었던 부자입니다.
만족하지 않기에 부족을 느낍니다. ‘영적 빈곤’입니다. 재물이든 지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곁에서 볼 때는 ‘참 많이’ 가졌건만 밝은 모습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이지만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힘을 받지 못하면 그런 삶을 계속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언제라도 ‘주님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힘이 재물의 힘보다 강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힘이 주어집니다. 만족할 수 있는 힘이 살아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생각이 마음을 바꾼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승과 저승에서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희망을 느낍니다. 재물보다 강한 것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버려도 버릴 것이 생깁니다
-반영억신부-
“저는 이 세상에 나와 잘한 일이 없습니다. 좋은 곳에 써 주세요.” 하시며 평생 모은 돈을 서울교구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나신 분이 계십니다. 채소장사, 쌀장사를 하면서 한 겨울에도 난방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해진 내의와 양말을 기워 입으며 모은 돈 10억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기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런 분 때문에 따뜻해집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산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 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쓰고 모으면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헌과 나눔의 생활을 통하여 백배의 상은 물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현실을 넘어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기 바랍니다.
옷장을 정리하고 책상서랍을 정리 정돈하다보니 입지 않고 쓰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왜 그리 미련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겠습니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마음 안에 자리한 탐욕은 더 심각합니다. 사랑합니다.
경찰과 수박장수
수박장수가 신호를 무시하고 운전하다가 경찰차를 만났습니다.
뒤에 쫓아오는 경차차를 쳐다보며 수박장수는 우선 튀고 보자는 마음으로 차를 몰고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리저리 빠져 나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수박장수, 그런데 경찰차는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습니다. 수박장수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습니다. 경찰관들이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수박 하나 사먹기, 정말 더럽게 힘드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에제자들은 "몹시 놀랐다(ekplesso)"고 하는데, 얻어맞은 듯이 아예 하얗게 질려버렸다는 뜻.
제자들이 왜 이토록 놀라고 낭패감에 사로잡힐까?
외적으로는 다 버렸다고 자처하지만 내적으로는 잡다한 것에 얼마나 복잡하게 묶여 있는지를,
한 순간 번개처럼 깨달아서였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이렇게 외치는 셈: "어찌할거나, 나도 낙타인 것을!"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아아, 저는 낙타 옳습니다. 제가 암만 열심히 살고 기도한다고 해도,
저는 아직도 낙타처럼 덩치가 너무 커서, 바늘귀를 지나가기에는 어림도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는
바로 이 순간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눈여겨보시며’ (emblepo) 갑자기 귀를 뚫어 주시는 순간.
그리고 귀가 뚫리는 바로 이 순간이 비늘귀가 무한정 넓어지는 순간.
그리하여 덩치 큰 낙타가 그리로 유유히 지나가게 된다.
- 이 연학 신부, 성서와 함께 326(2003), 6-11 참조.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늘구멍보다 작아지는 것 - 그건데 그것은 사람 힘으로 불가능한 것.낙타인 내가 바늘구멍보다 더 작이지는 길이 하느님께는 가능함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 아닐까?

남이 없는 것
-윤원진 신부-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의사의 실수로 ‘중증 뇌성마비’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송명희 시인의 노래입니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가진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그 어느 것 하나 없었지만 그 부족함이 하느님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그녀에게 하느님은 ‘가능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불안함과 외로움, 그리고 절망은 자신만을 바라볼 때에 생겨납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만 있으면 앞으로도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낙타도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 안소근 수녀-
어제 복음 묵상 마지막 구절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예수님은 반전을 가져오십니다. 곧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크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지금 내 모습이 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입니다. 어제 복음에서처럼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제 삶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세상에 증거가 되기보다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력함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낙타도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늘 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낙타’가 빠져나가는 것도, 우리 눈에 ‘꼴찌’라고 보이는 사람, 그것이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첫째’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나는 낙타가 아니라고, 나는 충분히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나는 첫째로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한 수도원에 밥만 많이 먹던(아무리 아파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두 그릇씩, 그것도 고봉으로) 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많이 먹다보니 몸도 나게 되었고, 몸이 둔해지다보니 작업시간에 별로 도움도 안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기도시간에 졸기는 또 얼마나 조는지...
이를 늘 눈여겨보던 다른 한 수사는 매끼니 꼬박꼬박 밥 두 그릇씩을 게눈 감추듯 하는 그 수사가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밥을 한 그릇 이상 먹어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언제나 철저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밥만 축내는 형제가 어찌나 미워 보였던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둘 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고행에 열심이었던 "밥 한 그릇 수사"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 "밥 한 그릇 수사"는 여유 있게 천국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매일 밥만 축내던 그 수사, "지옥 아니면 적어도 연옥쯤 있으려니"했던 그 수사가 자기와 똑같이 천국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밥 한 그릇 수사"는 즉시 베드로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따졌지요. "이거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 공평하신 하느님이라고 늘 강조하셨는데, 완전히 뻥이었네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자네, 혹시 단 한번이라도 저 친구 마음 깊숙이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사실 저 친구, 적당량은 밥 두 그릇이 아니라 세 그릇이었다네. 원래 세 그릇을 먹어야 했었는데, 저 친구 그걸 참느라고 한평생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모를걸세. 그렇다면 결과는 당연히 천국이지."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느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이나 인간적인 사고구조를 완전히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펼쳐질 상황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기절초풍할 정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계산방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인간의 사고구조를 훨씬 능가하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말 가슴 철렁한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들, 저희 같은 수도자들 성직자들, 봉헌생활자들, 봉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섬뜩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제나 수도자들이라고 해서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겉이 그럴 듯 해 보이는 사람들, 말 잘하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선물 역시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겉은 비참해 보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평생 가난과 병고, 갖은 장애로 시달리던 사람들, 철저한 소외와 좌절 속에서 끝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을 충분히 소화해낸 사람들이며, 끝까지 견딘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 예약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못할 만큼 큰 슬픔이나 뼛속까지 사무치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그 영원한 안식과 다정한 위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요즘 자주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한 몇 일 더 빼먹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수도회 국제회의 참석 차 호주엘 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 건강히 잘 보내시고 주님 안에 늘 행복하십시오. 9월초에나 다시 뵙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임문철 신부-
본당대항 복사어린이들 축구시합 때의 일입니다. 한 엄마가 먹기 싫다는 아이를 붙잡고 “한 입만 더, 이것만 더…” 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 엄마는 아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그런데 더 못 봐줄 광경은 그 아이의 눈동자였습니다. 자기는 먹기 싫은데,
엄마가 하도 먹으라고 사정하니까 엄마를 위해서 먹어준다는 투였습니다.
“엄마, 나 이거 다 먹으면 뭐 사줄래요?”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달고 다닙니다.
주일미사도, 봉사도, 기도도, 성경공부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미사 한다고 하느님이 무슨 덕을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굶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을 위해’ 신부가 된 저는 사실 하느님을 만나면, “제가 아무리 잘못
살았어도 그래도 이것만은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 묶음의
청구서를 내밀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분명 완불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그 은총은 제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이름
-한명수 -
사범대학을 다니던 20대에 나는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가톨릭 학교는 내가 기대하는 ‘좋은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배운 바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성이 잘된 선배들한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분홍빛 그리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톨릭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서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쉬는 교우가 많았고, 비신자도 많았으며, 학교와 교회(법인)를 자기 안위를 위한 쟁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톨릭 학교 안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면 즐거워야 할 터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그들도 교회의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곳에 왔는데, 왜 교회 이야기를 하면 모두 불편해할까? 나에 대한 경계와 따돌림의 시선이 조금씩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가톨릭계 교사들의 기본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참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요즈음, 그 흐름 안에서 살아온 터라 나도 모르게 변해 있을 내 모습, 새로이 임용되어 오는 후배 교사들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그대로, 그들이 나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선배 교사는 아닐까?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께 먹칠을 하지는 않는지 조용히 고개 숙인다.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임영숙-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부자들은 자선행위에도 앞장섭니다. 미국의 최고 갑부 빌 게이츠는 자선금 기부에서도 해마다 1등을 기록합니다. 한국에서도 최고의 재벌이 사회 공헌에서도 최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늘나라를 살 수는 없겠지요. 극히 한정된 경험이지만 부자들을 만날 때 불편했던 것은 그들이 남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보고 접근한 탓이겠지요. 그러나 돈을 지키려다가 결국 재물을 섬기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재물이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니까요.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집착이 문제입니다.
더 갖고 싶어 집착하고 하느님 대신 섬김의 대상이 돼버리는 것은 재물만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명예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보다 더욱 위험합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성 추진 과정에서 성인 반열에 오를 분에게 문제점이 없는지 조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과 똑같은 제목이지만 이 영화는 변호사 일반의 문제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일지라도 갖은 지략을 동원해 무죄로 만들어 버리는 변호사들이야말로 영혼을 악마에 팔아버린 현대의 사교집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변호사(키아누 리브스)는 우여곡절 끝에 악마(알 파치노)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악마는 다시 살아나 징그럽게 웃으며 말합니다. “허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지.” 악마가 내세운 돈과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주인공이 결국 명예욕에 걸려 넘어질 것을 암시하지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저도 신문에 제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면서 명예욕의 위험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그 위험성이 느껴집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하늘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밥 두 그릇 수사(修士)>
-최종수 신부-
신앙은 가난과 정비례하고 부와는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신앙이 약해지면 교회가 웅장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당 앞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건축한 베드로 대성전은 부패했던 중세에 건립되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컵에는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컵 스스로가 다른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컵은 스스로 다른 물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자는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물이 가득 차버린 컵이 아닐까요? 한번 더 물어보고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자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부자의 마음은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로 가득 차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요? 피리도 속이 텅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비운 자리만큼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