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3-15)
"Let th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prevent them;
f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such as these."

말씀의 초대
여호수아는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동안 섬겼던 우상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고 살라고 당부한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주님만을 섬기며 그분 말씀을 따를 것을 다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두고 하늘 나라는 천진하고 단순한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향한 단순한 믿음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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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르타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한평생 일하며 가난하게 사시다가 류머티즘이 심해져서 걷지 못하고 장애인이 되신 할머니입니다. 한 평도 안 되는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기도만 하며 지내셨습니다. 요즘은 앉아 있는 것마저 어려워 누워 계셔야만 합니다. 통증 때문에 묵주도 드실 수 없어 겨우 손가락으로 묵주 기도를 바치고 계십니다. 사는 것이 지옥 아닌 지옥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일 텐데, 그 할머니는 여전히 천진한 어린이처럼 맑고 밝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다시 어린이처럼 단순해지기 시작합니다. 육체적 기력도 약해져서 일을 할 수도 없고 기억력도 떨어져서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린이가 자주 삐지듯이 작은 일에도 섭섭해지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단순해지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단순해지느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젊어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분노만 남아 있는 사람도 있고, 젊어서 욕심만 채우며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고 기도하면서 산 사람들은 천진한 어린이처럼 다시 해맑아지고 노년이 아름답습니다. 바로 고통 속에서 누워만 계시지만 기도가 자신의 소명이 되어 사시는 마르타 할머니의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 우리가 단순해지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해맑고 순수한 어린이처럼 단순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 맑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자꾸자꾸 비워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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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순진하고 이해타산이 적은 이들이지만, 그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약자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강자인 어른들은 약자인 어린이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해타산의 방편으로 삼으려 드는 경향이 짙고, 때로는 자신들의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은 우선 약하고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중용(中庸)의 도(道)입니다. 중용의 도는 저울추와 같아, 모자라면 보태 주고, 넉넉하면 덜어 내어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은 못 가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배운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에게 배운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자인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모두가 잘났다고 나서며,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얼룩진 어른들에게 보내시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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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는 올봄에 엄마를 잃었습니다. 이제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운명입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정아의 유일한 희망은 천국에서 엄마를 만나는 일입니다. “정아야 잘 있었니? 할머니도 잘 계시고?” 어린이 미사 때면 일부러 정아에게 말을 건네려 애씁니다.
승미는 아빠가 없습니다. 지난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늘 어두운 그림자가 작은 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어린것이 안쓰러워 만날 때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시키곤 합니다. 그럴 때면 쳐다보는 눈가에 목마름이 가득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흩어져도 승미는 가지 않고 기다립니다. 어깨를 안아 주고 잘 가라며 토닥거려야 떠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저는 승미의 아빠가 됩니다. 너무 빨리 삶의 슬픔에 적응해 가는 승미가 안타깝습니다. 시련이 은총이란 걸 언제쯤 깨닫게 될는지요?
세상에는 가슴 아픈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 어른들의 잘못이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축복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 따듯한 빛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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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특성은 순진함입니다. 그들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말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추기경이든 대통령이든 그들에게는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그들에게는 아저씨나 아주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뿐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좋아하시는 것은 그런 순진함 때문이 아닐가요?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반영억신부-
반모임 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할머니가 데려온 어린 아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 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온전히 의탁하는 단순함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시편131,2) 같이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어린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
-상지종신부-
흔히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순수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백사장의 모래성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을 주는 이와 한마음이 되어,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 가운데 서로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이에게 꼭 필요한 값진 능력입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능력을 서서히 잃어갑니다. 아름다움을 잃어
가는 자신을 탓해야 하거늘, 순수한 사랑이 없어져 간다고 세상을 탓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메말라 간다고 말해지는 세상 안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있는 그대로 품에 안는, 그래서 사랑을 낳고 전하는 빛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어린이들을 사랑스레
품에 안아 주십니다. 세월에 지쳐 아름다운 사랑을 내쳐 버렸던 나의 지난날.
나는 안타까움을 훌훌 털어내고, 내게 주어진 모든 사랑을 있는 그대로
소중히 품에 안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처럼…
어릴 적 그분
-김호균 신부-
유다인 학살로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히틀러도 어릴 때는 평범한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종교의 영향 안에서 자랐고 어릴 때에는
수도원에서 자주 놀기도 했습니다. 한때 성직자가 되려는 꿈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히틀러가 선동가로, 학살자로 변해갔던 그 밑바탕에는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 당시 성직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한번은 냇가에 갔는데
잘사는 친구들이 주로 들고 다니던 물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먼 발치에는
퇴비를 준비하는 어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물통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그것을 훔쳐다 집에 몰래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안 그런 척하고
냇가에서 다시 놀았습니다. 얼마 후 물을 마시려던 그분이 물통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제게 물통을 ‘못 봤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사람이 다녀간 건 너 뿐인데’ 하면서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며칠 후 그쪽 동네를 지나가다가 그분이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분이 저의 잘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전 사제가 돼서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데 지금보다 훨씬 인색했을 것 같습니다.
온전한 의탁
◆다섯 살인 한봄이는 제 친구이자 딸 같은 아이입니다. 수도자인 제게 딸이 있을 리 없지만 한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온 까닭에 자연스럽게 가족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한봄이가 기어 다닐 때입니다. 꿈터로 들어설 때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한봄이에게 달려가 보면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곤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도 안아주면 안도감이 느껴지는지 그칠 것 같지 않던 한숨 섞인 흐느낌이 잦아듭니다. 그러고는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기 시작합니다. 다른 언니나 오빠들보다 저를 더 따르는 한봄이는 제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마치 엄마와 딸처럼 점점 얼굴도 닮아가는 듯했습니다.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한봄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엄마를 찾습니다. 아마도 아이에게 엄마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요 관계인 것 같습니다. 넘어져 다쳤을 때나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나 봅니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온전한 보호처인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에 이렇듯 집중하는 아이들의 전적인 신뢰와 의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른들에겐 쉽지 않은 전적인 투신과도 같습니다.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엄마를 온전히 신뢰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충분한지 자문해 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전부이듯 우리한테 예수님이 전부인지요? 이 물음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전한 신뢰와 의탁의 기쁨보다는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데서 더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십니다. 어린이같이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초대입니다. 인간적인 궁리나 능력에 의지해 살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살라는 초대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 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린 자유로움 속에서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되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아이들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온전히 의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
-김광태 신부-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엄마와 떨어지는 게 싫어서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업 끝나고 돌아올 때는 동네 초입쯤부터 달리기 시작하다 대문을 박차고 집에 들어가면서 “엄마” 하고 외칩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에 안 계셨습니다. 부엌에도 뒤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주 가시던 옆집에도 안 계셔서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느 집에서 엄마를 만났고,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엄마 치마폭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없이 살던 때였으니 엄마가 과자를 준비해놓았다가 주시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 새끼 잘 갔다 왔어?”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일 말고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울음을 멈출 때쯤, “왜 울었어?” 하는 엄마의 질문을 받고 정말 그땐 왜 울었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누굴까?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사람일까?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이런 설명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 다른 측면이 있지 않나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이미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일화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아이처럼,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다른 어떤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김흥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 겸손과 단순 그리고 신뢰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가리켜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성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산 분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성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하느님 앞에 가장 작은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린이의 길을 택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으며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성녀가 깨달은 진리는, 성화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어린이와 같이 작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걱정하지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를 하늘까지 들어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성녀는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겸손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하듯이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그래서 성녀는 겸손이나 희생 혹은 애덕과 같은 덕행의 실천에 있어서도 어떤 계획이나 방법을 따로 세우거나 특별한 기회를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기회나 사소한 것들 안에서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실천했다. 또한 성녀의 생활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넘쳐 있었다.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겼으며, 설사 고통을 통해야 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성녀는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무능력함·작음·허물이나 미천함을 느낄수록 무한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고 더욱더 신뢰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어린이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대에게
<이현주 목사의 마르코 복음 읽기,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마태오 19,13-15과 병행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예수께서 해설하는 부분 한 대목을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예수에게 도를 묻다. 351-352쪽)
사족(蛇足)을 붙이자면 성(聖)과 속(俗),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 미(美)와 추(醜), 호(好)와 오(惡)를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分別心)이 지옥(地獄)을 만들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般若智)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분별심을 버리려면 도리 없이 ‘나’(妄我)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늘나라(天國)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