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주간 월요일(마태17,22-27)

2011. 8. 8. 오전 6:33:32

글자

2011년 8월 8일 월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7,22-27)
“What is your opinion, Simon?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take tolls or census tax?

From their subjects or from foreigners?”

 

 

말씀의 초대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바라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주님을 경외하고 당신께서 가르치신 길을 따르며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또한 당신께서 명령하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제1독서).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납세를 하시는지 묻는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지만, 갈등을 피하시려고 성전 세를 내신다. 인간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그르칠 필요가 없으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리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묻습니다. 당시 스무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사제들과 라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연 성전 세를 내고 계시는지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전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그 가족인 제자들까지 세금을 낼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응답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성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세금을 내지 않으면 실증법을 들먹이며 끊임없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 가끔 사소한 일에 걸려 넘어져서 본질적인 일을 그르치는 때가 있습니다. 당시 성전 세로 바쳐야 할 ‘두 드라크마’가량 되는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부딪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제에 부딪힐 때는 무엇이 본질이고 중심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소한 것에 매달리다 보면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놓치고 맙니다. 우리 삶에서 양보할 수 없는 참되고 중요한 가치는 지켜야 하지만,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내 우리 삶을 지치게 하여 결국 헛된 것에 인생을 낭비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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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과 논쟁을 벌이시면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고, 성전 세금을 내십니다.
세금은 나라를 꾸려 나가는 밑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금 부과는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나라의 지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원천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도 권력의 노예나 이용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세금은 인정할 수 있지만, 부당한 세금은 낼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지불하시는 이유는 이차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양심상 자유롭지만, 남 생각을 해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각도 좋지만, 이웃 사랑의 원칙 때문에 타인의 생각을 앞세우십니다. 그러나 이후로 주님의 공동체는 성전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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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도 세금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에 바치는 ‘인두세’는 반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14세부터 의무적으로 인두세를 바쳐야 했으니 분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성전 세도 내야 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는 해부터 해마다 두 데나리온을 바치는 세금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화폐인 ‘세켈’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는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움켜쥐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돈은 죽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내면 기쁘게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세금을 내셨습니다.
돈은 삶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생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탓에 돈의 속성인 불안과 걱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돌고 돌기에 돈’이라는 말은 옛말입니다. 지금은 ‘너무 좋아하면 머리가 돈다.’는 의미에서 돈입니다. 실제로 돈을 너무 좋아해 머리가 돌아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예고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며, 당신께서도 거기에 기꺼이 동의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이성으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합니다. 성전 세는 성전 유지와 희생 제물의 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성전 주인이나 제관들은 납세 의무가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 만큼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 식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시빗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세금을 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려야 할 몫을 제대로 바치고 있습니까?

 

 

적절한 순서와 아량을

  -반영억신부-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철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만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성전세로 성전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과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사제들은 납세의 의무로부터 면제 대상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참 주인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아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원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하면. 성전유지를 위한 성전세와 같은 것이 오늘의 교무금이나 봉헌금입니다. 교무금이나 봉헌금은 성전을 유지하고 사제의 생활을 보장하며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쓰여집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는 교무금이나 봉헌금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제때에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납세의 의무가 없었지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기쁨과 고마움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내안에주님만계시네 / 내생각다버리고 CCM악보 [채인순1집]

라는 틀을 깰 때

-김희준 신부-

 

올해로 피정집을 맡아 온 지 3년째에 접어듭니다. 별일 없다면 내년에는 아마도 새로운 소임이 주어질 것이고 새로운 곳으로 파견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소임이 주어질까? 어디로 가게 될까? 또 어떤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될까
?’
생각하면 할수록 은근히 초조해집니다. 그만큼 피정집 일에 적응됐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지금 일에 적응되어진 만큼 다른 일은 잘 못할 것 같고, 지금의 사람들과 정든 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예상한 만큼의 열매만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틀을 깰 때 생각지 못한 행복과 예상치 못한 열매들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전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지니신 유일한 관심사는 목숨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걸으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비우시고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새로움에 자신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새로움을 통해 더 큰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고해성사

- 최재도 신부-

 

아마 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한 월간지의 표지 기사로천주교의 신선한 고해성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한 성당에서 1년 동안 성당 재정을 모든 신자가 볼 수 있게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비밀리에 부쳐져 사용되던 종교 재산 사용 내역을 공개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모양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하는 성당이 많습니다. 그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을 다루는 데 그만큼 자유롭고 자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됨을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세상의 요구에 어느 정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당당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표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십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한 해 동안 사용한 재산 내역을 공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해오지 않았기에 세상은신선하다
?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내 안에만 가두고 소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마음이든 가두어 두면 문제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자유
?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내 안에 움켜쥔 것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하느님 앞에, 세상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신부님
-김호균 신부-

 제 책상 위에는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신부님(신학교 입학 때 추천하신 분)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 기대고 있던
기둥이 쓰러진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며칠 동안 슬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한번은 시험을 너무 못봐서 학사경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보여드렸는데 신부님이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한참을 보시더니 “괜찮아,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물 담을 그릇을 찾다 보면 소주잔 같은 것도 있어야
하고, 컵도 있어야 하고, 큰 통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도 그런 거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쓰는 거야. 그저 자기가 담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담으면 그게 가장 적절한 거야. 우리 마르코도 마찬가지야 걱정하지 마라.”
돌아가시기 20여 일 전쯤 편지 한 통을 주셨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혼탁하니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제, 성덕으로 사는 사제’를 원한단다. 마르코도
그렇게 살아주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록새록 돋아나면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분의 행적을 깊이 이해했던 제자들의 마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남궁영미 수녀-

 제가 사는 곳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화양계곡으로 유명한 속리산 자락입니다. 1996년에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8년을 기다린 끝에 파견을 받았습니다. 지역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 ‘하늘지기 꿈터’에서 생활한 지 이제 4년이 다 되어갑니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그리 만만치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성장해 가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나 자주 제 생각이나 판단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 생각과 판단이란 것이 대의명분일 때도 있고, 예의나 옳고 그름에 대한 저의 가치 판단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무리 옳고 의미 있는 것이라 해도 제 생각이나 판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묻고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느끼듯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많이 약해진 요즘 아이들한테는 차라리 “이 길이야!”라고 제시하고 이끄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묻고 생각하는 동안 기다리는 것. 그 긴 과정을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에게 직접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이런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찾게 하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잠잠히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안의 잠재된 힘을 믿으며 인내롭게 기다려 줄 때 아이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이란 저를 비워내는 일일 것입니다. 당무유용(當無有用)! 빔이 쓰임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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