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listen to him."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자신이 본 환시를 전한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연로하신 분’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그분께 나타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넘겨주시는 천상 등극의 장면을 전해 준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신약에서 ‘사람의 아들’ 곧 당신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하시어, 다니엘 환시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해 주신다(제1독서).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황홀해하지만 이내 사라진다. 암울한 십자가의 죽음이 드리워져 있지만 그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전해 준 사건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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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한 그루의 나무, 그냥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나무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물어보십시오. 그 옛날 어느 때인가 한 작은 씨앗으로 생겨나 여기 이 땅에 터를 잡았던 그 사연을 물어보십시오. 긴 세월 동안 스쳐 갔던 밤과 낮, 비와 눈, 바람과 이슬, 계절의 변화 겹겹이 품고 있는 나무의 모든 이야기를 물어보십시오.
발끝에 부딪히는 돌멩이 하나, 그냥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돌멩이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살아온 이야기를 물어보십시오. 수억 년 그 땅속 깊은 곳에 굳어지고 굳어져 저 산꼭대기 우뚝 바위로 솟아올라 당당했던 시절의 이야기, 비바람에 깎이고 깎여 여기 한 덩이 돌멩이가 된 사연을 물어보십시오.
스쳐 지나가는 사람, 그냥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그가 존재하고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헤아려 보십시오. 태초부터 지금까지 점점이 이어져 온 사람들을 거쳐 여기, 오늘 지금 만난 이 사람이 왜 나와 함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의 삶을 듣고 그를 있게 한 역사를 듣고 그를 있게 한 시원(始原)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를 빚어 만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그 무엇도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가난한 떠돌이 예수님 그 안에 타보르 산에서 보았던 황홀한 세계가 있듯, 보이는 것 그 깊은 곳에 눈부신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겨났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으니, 그 깊고 깊은 곳에는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나무는 저 깊은 곳에서 하늘 나라의 숲이 되고, 돌멩이는 저 깊은 곳에서 하늘 나라의 산이 됩니다. 내가 만난 사람은 저 깊은 곳에서 하늘 나라의 영원한 친구가 되고 보이는 것 모두 다 저 깊은 곳에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가 되니, 세상에서 만난 모든 것 모든 이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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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를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강렬한 느낌은 없습니다. 나날이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신데도 뚜렷한 감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막연히 하늘에 계신 분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니 계신 데 없으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하지만 감각적인 깨달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힘을 느끼고 부딪혔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수없이 만나고 함께하면서 경험하였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계 밖에 존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감싸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무들을 감싸고 새들을 감싸고 들판의 풀들과 미물(微物)까지도 감싸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모에만 놀란 것이 아닙니다. 만물 안에 숨겨진 창조주의 모습을 비로소 깨달았기에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은총입니다.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욕심을 부리려면
-반영억신부-
“어떤 개가 고기 한 첨을 물고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본 그 개는 그것이 더 큰 고기 덩어리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속의 개가 가지고 있는 고기를 빼앗으려고 덤벼듬과 동시에 자기 입에 물고 있던 고기 덩어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이솝우화) 이 이야기는 현재 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생각합니다.”(쇼펜하우어)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해처럼 빛나는 얼굴을, 그리고 빛과 하얀 옷을 보여 주셨습니다(마태 17,1-2).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체험을 영원히 간직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욕심을 부리려면 이런 욕심을 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차지하게 하소서”(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 사실 주님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5,5) 그러므로“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5,8)
그러기 위해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한2,3-4)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그러므로 다른 욕심은 접고 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또한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도록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합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 이정석 신부-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가 얼떨결에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초막을 짓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이 장면을 대할 때마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로 시작되는 <님과 함께>라는 노래가 떠오르곤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 변모사화를 공관복음은 공통적으로 첫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배치합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와 마찬가지로 이 대목에서도 베드로가 나서서 한마디를 던지는데, 이로써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가 더욱 부각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예고하는 선생님 앞에서는 펄쩍 뛰다가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선생님,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여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집 한 채 뚝딱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냥 여기 눌러 살지요?”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베드로보다 더 확고한 어조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하면서 죽음을 향한 당신의 길을 계속 가겠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오히려 주님께서 다윗에게 한집안을 일으켜 주고, 그의 후손 왕좌를 튼튼히 해줄 것이며, 그의 후손이 죄를 지으면 매와 채찍으로 징벌하겠지만 영원히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2사무 7,1-29 참조). 베드로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교회의 반석으로 제 몫을 다하게 됩니다.
기나긴 인생 여정 중에 안주하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은 늘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현세의 생활에 안주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안주하려는 제자들을 잡아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그 선생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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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올라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대에게
저는 산을 좋아합니다. 산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변함없이 거기에 머물고 있기에 찾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구별하거나 거절하지 않습니다.
제 발로 걸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성자도, 죄인도, 세리도, 창녀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산은 높습니다. 높다는 것은 하늘과 가깝다는 말입니다.
산에 오를 때는 제 발로 올라야 하고, 내려 갈 때에도 제 발로 내려가야 합니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아무도 대신 산에 올라주거나 내려가 주지 않습니다.
산에 오르면 누구나 고독해집니다. 고독해지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은 모든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자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 품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소명을 받는 자리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출애3,1)도,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1열왕19,8)도 모두 산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높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召命)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태양처럼 빛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증인이 되어줍니다.
당신의 오늘도 산을 오르는 날이 되기를,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召命)을 받는 행복한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