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7주간 금요일 (요한11,19-27) 성녀 마르타 기념일

2011. 7. 29. 오전 6: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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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 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9-27)

  

 

말씀의 초대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느님 사랑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신다(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능을 부여받으셨음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리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복음서를 쓴 목적이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0)이라 하였습니다. 복음서의 목적처럼, 예수님께서 공생활 내내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바랐던 것은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바로부활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생명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 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게 됩니다. 그 깊은 깨달음에서 주님의 부활과 생명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
믿음이 깊어질 때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자리에 이미 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삶이 주님의 생명에 뿌리를 내리게 되어 중심이 잡히고, 웃고 울리는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삶의 풍파가 몰아쳐도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생명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믿음의 잣대일 수 있습니다.

 

☆☆☆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마르타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잃었기 때문에 그 슬픔은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반쯤은 볼멘 소리이고, 반쯤은 원망에 가깝습니다. 주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가시 돋친 대답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의 소망은 오빠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려 내십니다. 이는 마르타의 신앙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이 원망스럽지만,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부활이시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을 모시며, 마르타의 신앙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

  

 

목욕탕에 갔습니다. 탕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때 어떤 아이가 물었습니다. “안 뜨거우세요?” “뜨겁단다.” “그런데 참는 거예요?” “그래, 참는단다.” “어떻게 참으세요?”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것도 참아야 한단다. 이런 것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앉아서 참아 내는 거야. 너도 한번 해 보렴.” 하지만 아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호기심의 미소만 띠고 머뭇거립니다.
참는 것을 어찌 강요할 수 있을는지요? 살다 보면 참아야 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만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에 인내가 몸에 뱁니다. 사랑 역시 참는 행위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참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참사랑입니다
.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투정과 협박이 뒤섞인 청원입니다. 하지만 마르타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인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
지금도 사람들은 엄청난 협박성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들어주십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어린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른의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내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행위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입니다. 오빠의 병이 깊은 것을 알자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청한 것이지요. 평소 가깝게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틀이 지난 뒤에야 움직이십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정에 가까운 마르타의 청원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바쁩니다. 고통 앞에서도 바쁩니다. 평소 느긋했던 사람도 사고를 당하면 금방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조급하다고 주님께서도 그러려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기적은 언제나 천천히 일어납니다.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라자로’는 이스라엘의 흔한 이름인 엘리아자르(Eleazar)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라는 뜻을 지녔지요. 신약 성경에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거지 라자로와 요한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를 살려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마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외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역시 마르타의 고백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기적의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기적 사랑인 에피튜미아, 성적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헌신적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처음엔 대부분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헌신적 사랑으로 완성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헌신적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헌신적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그분의 사랑은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견주면 아주 미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모두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어쩌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는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산다면

  반영억라파엘신부-

84세 된 할아버지께서 20년 전 돌아가신 부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돌아가신 부인은 할아버지께 “집 담장밖에 금불상이 묻혀있으니 꼭 그 불상을 찾아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부인의 뜻에 따라 20년 동안 열심히 땅을 파고 돌을 깨내며 매일 매일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일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 건강이 회복되면 그 일을 계속 할꺼야. 할머니는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하셨습니다.

 

거짓이 없었던 부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부인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기에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주기 위해서,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마지막 사랑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께서 남겨준 일이 곧 행복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꿈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활동적이고(루가10,38이하) 힘찬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간 것은 역시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입니다. 그가 예수께 한 말씀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잇습니다.”(요한 11,21-22).

 

마르타는 울며불며 살려 달라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맡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어려움에 닥쳤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면 그 다음은 주님 몫인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신뢰, 믿음이 있는 만큼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바람을 충족시켜 줍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11,23). 이 말씀을 듣고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일어날 일로 말씀하셨지만 마르타는 먼 훗날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타의 마음 안에 마지막 날의 부활만을 생각하는 선입견이 자리한 탓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 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지금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순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순간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단순히 육신의 죽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슴에 제대로 모시고 산다면 매일이 생명입니다. 매일 매일 부활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있으면 주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7).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꿈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사랑하신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 마음이 늘 할머니로 가득 차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늘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하시길 빕니다.

 
 
 

최고의 대접

-황지원 신부-

 

본당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환자들을 방문하고 영성체를 하도록
해줍니다. 보통 열 집에서 스무 집 정도 방문하게 되는데, 간혹 음식 대접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한두 집을 방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조금씩만 먹고 사양하게 되는데 음식을 내놓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한번은 노부부가 사시는

댁에 갔습니다.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칠십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수발을

드는데, ‘할머니하고 들어서면 이미 하얀 천을 덮은 상 위에 초와 십자가를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성스런 음식보다 참으로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가 잘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두 분의 집을 방문할 때면 힘이 절로

납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두 분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함께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두 자매는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생각하며 그분을 맞았습니다
.
마르타는 아마도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손님맞이를 하기 위해 분주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며 말벗을 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필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임을, 그것이 당신께서 그 집을 찾으신 이유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귀한 일

- 이동훈 신부-

 

오늘 기념하는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이며 마리아 막달레나의 언니다. 집으로 찾아온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잠깐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루카 10,41) 예수님한테 약간의 핀잔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좋은 몫(관상)과 더불어 마르타의 몫(활동)도 훌륭하다. 아마도 마르타는 예수님의 그러한 충고 덕분에 자기 활동의 근원을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동생 라자로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하고 반듯한 그녀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랑과 믿음은 결국 죽은 라자로를 살렸다.

마르타는 복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요리사와 가정주부의 주보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여러 가지 가정 일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가가는 좋은 길임을 알려준다. 자연과 농부, 여러 사람의 수고로 얻은 재료로 음식을 장만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방 안을 깨끗이 하고 아름답게 꾸며 가정을 보다 편한 휴식과 사랑의 공간으로 꾸미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가정의 여러 일은 자연을 통해 우리를 부양하고 회복하고 치유해 주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고귀한 일이다
.

그러나 현재 많은 주부가 가정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다. 가정의 많은 일을 가사 도우미나 인스턴트식품에 맡기고, 자신은 파출부에게 줄 돈과 인스턴트식품 살 돈을 벌기 위해 더 고귀한
(?) 일을 찾아 나선다. 밖에서의 일이 자아를 실현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한 맞벌이라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식 사랑

-김 맛세오 수사-

 

흔히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활동보다 관상을
우위에 두는 경우를 종종 대합니다. 그러나 둘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두 가지 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
다만 여기서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주방 일을 하는 마르타의

활동에 대하여 꾸짖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바쁜 언니의

상황이지만 당신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만 몰두해 있는 마리아에 대하여

기특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순간들은 밥 먹는 일처럼 늘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대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몫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처럼, 선택의 몫 또한 각자가 다른 법인데도, 우리는 눈에 잘 띄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온 마음과 열정, 관심이 주님께만 가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또한 당신 사랑에 몰두해

있는 그런 마리아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기특했을 것입니다. 분주한 마르타의 일을 특별히 돕지 않는다고 하여도 어떻게든 손님 접대의 식탁은 잘 준비될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와 같은 활동적인 사랑의 지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 말씀 안에 침잠하는 관상적 투신 역시 타인이나 자신의 쇄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몫입니다.

 

           

                                            

 

 †찬미예수님

이제 지리하던 장마도 끝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장마철이라도 가끔은 빨래라도 말릴 수 있게끔 하느님께서 이렇게 햇빛을 중간 중간에 주시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체험하게 합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편애라기보다는 특별히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었는데... 마리아와 마르타, 나자로라고 하는....편애와 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얼핏 보면 예수님이 이 세 남매를 특별히 사랑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편한 집, 마리아와 마르타 나자로가 살고 있는 집에 들르십니다.

분명히 편한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집이 있습니다.

편한 집은 집의 모양이 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사는 인간들이 편하기 때문에 그 집이 편하다고 할 겁니다.

다 쓰러져가는 하꼬방이라고 해도 따뜻한 집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이런 집이 편합니다.


불편한 집이 있습니다.으리으리한 대저택이라고 하더라도 차갑습니다.

가족들이 교만합니다. 부모서부터 자식들서부터~~심지어는 기르는 개까지 교만합니다.^^식구 몇 안 되는 데도 서로 ‘무조건 니 탓이다!’ 손가락질만 하고 살지~~

그런 집구석은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편한 집은 사제들에게도 편합니다.

사람 차별이 아니라 그냥 쉬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

감곡에 있냐구요! 물론 있을 겁니다. 저는 사제 생활 하면서 원칙이 있습니다.

본당신부를 하는 기간 동안에는 아무리 편한 집이라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라~~신부님이 어제께 밤에 어느 집에서 새벽 두 시까지 퍼마시고 갔대~~그 얘기가 뻥튀기처럼 돌고 돌아서 희한하게 들립니다.


저는 이제껏 사제생활 하면서... 그 본당을 떠나서는 그 옆을 지나가다

편하게 들러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고 가는 한이 있어도....적어도 그 본당에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가정방문 외에는 신자 집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감곡신자들 신부님이랑 나랑 많이 가까워 졌는데도 왜 우리 집에 안 오실까!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 세 자매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성서에 보면 나자로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피 우셨고 부활시켜주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찾아갔던 이 날은 너무너무 피곤하셔서 몇 시간만이라도 사람들과 떨어져서 쉬고 싶으셨을 겁니다.

 

저도 체험을 많이 합니다만 밖에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말수가 적어진다고 합니다.

개그맨이라든지...앵커라든지....아무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말이 적어진다고 그럽니다. 이해가 갑니다.

피정을 많이 하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지요. 사제관에 와서는 말하기가 싫어집니다.그냥 조용히 편하니....말하지 않고 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마르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오시기만 하면 반가우니까 대접해 드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삼겹살을 준비합니다. 녹두부침개를 부치고 우리밀로 만든 막걸리를 준비합니다.또 가까운 데서 광어회를 떠다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준비합니다.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그 친절은 자기 위주, 자기중심의 친절이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우리는 친절을 베풀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중심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구역모임을 합니다.

자기중심의 친절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줄 때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중심의 자기위주의 사랑을 베푼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왜 안 받아들여~~ 내가 얼마나 너한테 사랑을 쏟고 정성을 쏟는데....”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자기중심의 사랑을 강요하기 때문에~~  상대편에는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이지 기쁨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자기위주로 예수님께 어떻게 해서든지 기쁨을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를 보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가 무슨 공주인양~~ 우아하게 턱을 받치고~~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말만 듣고 있는 거예요.

속에서 그냥 부아가 확 치밀어 오르지요~~나는 손이 두 개라도 모자라서 바빠 죽겠는데~~저 싸가지 없는 것은 말이야~~ 지가 무슨 공주라고 턱 받치고 앉아서~~

언니를 도와주지 주지도 않고~~마음 같아서는 쫓아가서 귀퉁뱅이라도 걷어 올리고 싶지만 예수님 앞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고....그래서 일르지요?

“제 동생이 일을 저에게만 떠맡기는데 예수님, 가만 두시렵니까?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역성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입맛, 밥맛, 혀맛이 다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냥 조용히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교우 집에 가정방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에 3~40집을 돌아야 되기 때문에~~ 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불과 5~7,8분밖에 안 됩니다. 그 짧은 시간에 교적을 보면서 뭔가 대화를 하고 나가고 싶은데...

집에 들어가면 “이리와 앉으세요.” 해도 앉지 않고 “신부님 뭐 잘 드세요?” 부엌에 들어가서 연신 쿠당탕쿠당탕 거리면서 “빨리 와 ~~ 물 먹으러 온 게 아니야 빨리 빨리 해야 해 ” 싸이클이 맞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도 아마 그러셨을 거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역성을 들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마르타가 듣기에 서운한 말을 하셨지요? “마르타~~마르타~~”

두 번이나 부릅니다.<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다...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 절대 빼앗지 말아라!>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온 것은 삼겹살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밥맛도 없어~~

너무 피곤해서~~나는 니들이랑 이야기하러 왔는데 왜 이렇게 부산을 떠느냐~~

마리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이다...니 동생의 몫을 빼앗지 말아라!


마르타를 흔히 활동하는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마리아기도하는 사람으로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순서는 있습니다.먼저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인간이 되고 난 후에

마르타처럼 행동으로 보여야 됩니다.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기도가 밑바탕으로 되어 있지 않은 교회의 모든 활동은 분명히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체면 때문에 하게 되고 교만해집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듣고 묵상하면서 내 자신이 먼저 은총으로 적셔지고 그 적셔진 물이 흘러넘쳐서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사람으로 되어야 하는데 마르타는 순서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분별이 필요한 것이죠?


러시아의 어느 철학자는 예수님을 단 두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고독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인간이었다>


우리들은 분명히 고독해야 됩니다.고독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됩니다.

고독은 이성을 찾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롭다는 것과 뜻이 다릅니다.

사제는 고독한 존재지..외로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은 사제에게서 고독을 보아야 됩니다.

‘우리 신부님 외로워 보여~~ ’ 그건 욕하는 겁니다.

고독은 사제든, 누구에게든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독을 통해서 얻은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동시에 이웃에게 나누어 줘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서 고독하며 사회적인 인간이다!


여러분들 머릿속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계시죠? 그것 해결하는 것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필요한 것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내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기도해라!>

왜 딴 데다 신경을 쓰느냐~~지금 니 집안에 일어난 이 문제, 니 문제....

내 곁에만 머물러 봐라! 세상 방법 쓰기 전에 먼저 기도부터 하십시오!


인간은 기도로써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써 약해지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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