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16주간 목요일 (마태13,10-17)

2011. 7. 21. 오전 5:52:37

글자

2011 7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마태오 13,13-17)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이르자 주님께서 짙은 구름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다. 구름은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모세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간다(1독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불행하다.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 주님을 알아뵙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상에서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9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Novalis)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 있고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닿아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들음 그 깊은 곳에, 우리의 시선 그 너머에,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한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귀가 너무 밝아 진정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너무 밝아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 중복 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내 일과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과 귀가 먼 사람이었지만, 영혼의 눈과 귀는 성한 우리보다 오히려 더 밝고 맑았습니다
.
경륜이 깊은 석공은 바위를 정으로 두드려서 소리만 듣고도 그 돌의 성질과 결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나무를 오래 다룬 목수는 나무의 겉모습만 보고도 그 나무의 나이테와 나뭇결을 읽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도 경륜 깊은 석공이나 목수처럼 되어야 합니다. 들리는 소리보다 더 깊은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 너머의 더 먼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없는 사람이 그나마 있는 것을 빼앗긴다니 이상하게 들립니다. 물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입니다.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주어진 은총마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운동선수 가운데에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이들이 많습니다. 강한 체력과 뛰어난 감각을 태어날 때부터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드러냅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국가 대표가 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직업 선수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화려했던 선수가 일류 프로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가라앉고 맙니다. ‘명성과 돈이 늘 그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절제를 잃어버리면 체력도 잃게 됩니다.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결과입니다.
일류는 어딘가 다릅니다. ‘2퍼센트의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바로 절제와 자기 통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 더 받습니다. 하지만 절제와 통제를 망각하면 이미 지니고 있던 무엇도 사라지게 됩니다. 어찌 운동선수뿐일는지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법칙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매일매일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어떤 경우든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엉망으로 사는 것 같아도 좋은 모습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어 있던 ‘좋은 모습’이 은총을 모셔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은총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길만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포장이 안 된 길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평생 그런 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걷다 보면 포장된 길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일과 같습니다. 건강한 나무는 건강한 뿌리를 지녔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뿌리가 튼튼하면 그 나무는 시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시원찮으면 나무는 생기를 잃고 맙니다.
기도 생활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뿌리에 활력을 주는 일입니다. 매일 한 가지씩 선행을 베푸는 일이 나무에 물을 주는 행동입니다. 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성체를 모신다면 믿음의 나무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삶이 꽉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안에 숨어 있는 ‘좋은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자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외국을 여행하거나 이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말이라 할지라도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설명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황우석 교수의 사건에서 몇 장의 잘못된 사진으로 그 사기가 들통 났습니다. 생물학의 문외한들은 그 사진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없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은 끈질긴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식민 생활을 하였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을 지배하고 괴롭히던 민족은 사라져도 이스라엘은 굳건히 남아 있습니다.
그 속에는 기다림이라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민족이 그들이었습니다.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메시아가 오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상은 새롭게 엮이고, 이스라엘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로마의 지배가 극성을 부릴수록 이러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러한 시점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민중은 그분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보고 환호하지만, 지도자들은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무명의 시골 출신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보기엔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당시에는 이해되는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지 나자렛은 예언서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은 성모님의 고향, 곧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고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분을 선택하실 때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기다림도 합당한 대상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엉뚱한 목적일 때에는 오히려 추한 것이 되어 외골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읽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또한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읽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도 있을 수 있고 더 답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분명 달랐으나 하나에로 가야할 소명이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여 긴 말 없이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는 구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에게는 알아듣게 하시려고 비유를 통해서(마태13,13)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비유로 말하지 않아도 주님의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기본은 갖추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분명 일반 군중과는 다른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3,5-6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열고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지해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안셀모 성인은 말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보아야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믿지 않는 이들은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께로 향해 있으면 우리의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다. 사람들의 생각을, 그들은 입김일 뿐임을.”(시편94,11)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서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령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139,2-3).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는 만큼 더욱 넉넉해 질 것입니다.(마태13,12)

 

‘목마름은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른 것은 병이랍니다. 졸음도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자고 나서도 졸리는 것은 병이랍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가지고도 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큰 병이래요.(이규경)

 

세상 것에 병들지 말고 주님의 마음을 읽어서 영적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황지원 신부-

 

형제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한 형제가 우리는 하늘 나라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라며 이런저런 비유를 들어보자고 우리를 초대했는데, 마음처럼 좋은 비유가
생각나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그 안에 담긴 하늘 나라의 의미는 항상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숨은그림 찾기에서 정답을 보면 뻔히 아는데 찾기까지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이야 말로 하늘 나라의 비유가 아닐까요? 곳곳에 하느님이 계신데, 우리는 눈먼 사람들처럼 그분을 보기보다 내 일에 쫓겨서, 내 이익에 눈이 멀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그 고귀한 사랑을 불어넣어보시니 좋은세상으로 지어주셨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좋지 않은 것만을 보고, 불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은 하늘 나라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을, 또한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깨달음 1

- 박후임 목사-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올라온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깨치어 환하게 알아내다, 몰랐던 사정 따위를 알아채다.’ 알아내다, 알아채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아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알아낼 수도, 알아챌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것을 내려놓을 때 (모르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일 때)보이고, 들리는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지난 어버이날 즈음,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 라는 이름으로 마을 어르신을 위한 효도잔치를 열었다. 놀이마당으로 새내기(새끼줄)꼬기, 윷놀이, 물이 절반 담긴 요강 머리에 이고 달리기, 투호를 하며 재미있게 놀고, 맛난 간식과 점심,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노래자랑이 열려 어르신들의 흥은 오를 때로 올랐다. 어깨춤을 들썩이며 한가운데로 나와 덩실덩실 춤도 추셨다. 그저 보기만 해도 절로 행복했다. 그런데 시상식에서 어르신 한 분이 그만 삐치셨다. 아니 삐친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상을 못 받아서다. 당신이 노래한 이래로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며 이젠 노인학교에도 안 나오겠다며 시상 도중에 집으로 가버리셨다. 효도잔치 끝난 지 한참이지만, 30가구 밖에 안 되는 우리 마을은 아직도 그 이야기가 돌고 돈다. 사실과 관계없이 감정만 남아서. 받아들인다는 것, 나를 비워내지 않고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마음이 깨어 있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 열려있으니까.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다른 무엇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 그래서 볼 수 있는 눈이 행복하고, 들을 수 있는 귀가 행복한 것이다.

주님, 가득 차 있는내생각과 경험으로 인해 마음이 무디어져, 못 보고 못 듣는 일이 없도록 늘 비워내게 하소서. 아멘.

 

듣는다는 것

-남상근 신부-


이해하기 쉬우라고 비유를 쓰는 줄 알았더니만 알아듣지 못하라고 비유하신 거랍니다. 짖궂은 예수님이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거듭 말씀하시건만 못 알아듣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귀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 귀는 있으나 죄다 난청인 까닭이지요. ‘듣는다’함은 단지 음파가?
감청 기관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승복하겠다는 것, 준수하겠다는 것,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듣겠습니다’라는 우리말은 물리적인 소리를 감지하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단지 ‘청취’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복음에 나의 사고와 행동을 내놓겠노라는 다짐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징벌은 그저 가만히 두는 것이랍니다.
혼자 있는 것,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상 온갖 소리에 길들여져 있기에, 세상이 주는 달콤한 소리로 가득차 있는 나머지 고요함을 상실해버린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듣기 위해서 너무 많은 소리를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묻히지 않고 내게 잘 들리려면 가만히 있는 것이 무엇보다 상책입니다.


여성과 남성, 하나의 길을 위하여

-임인자-


태초에 하느님이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빼어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여성과 남성으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남성들 중에는 여성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며, 이것이 처음부터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이유라며 열변을 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와를 아담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갈비뼈로 만든 이유는 그만큼 아담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고 어떤 것이 버려야 할 악습인지 모른다면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세기에는 여성적 감성인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살아남는 때입니다. 직장에서도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평등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인간관계도 잘 맺고 창의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전처럼 남녀차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는 때가 된 것입니다. 한쪽이 불행한데 한쪽이 행복할 순 없습니다.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 3,13 참조)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중에서)라고 노래한 정희성님 시처럼 우리는 끝없이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성과 남성, 이제 서로 바라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동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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