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6-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마른땅을 밟고 바다를 건너 드디어 종살이에서 해방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에 길이 기억될 하느님의 큰 권능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모세를 믿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위대한 믿음을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드러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떠돌이처럼 사시는 아들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친척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오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 뵐 생각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들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배척하시는데 왜 그렇게 천주교는 성모님을 지극히 공경하느냐고 되물을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공생활을 하시면서 혈연에 얽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발 더 복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는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이신 것도, 아들을 살리려고 헤로데의 폭정을 피해 이집트 피난 생활을 하신 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던 것도, 성모님의 믿음과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십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실천을 한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자식을 낳았다고 다 부모인 것은 아닙니다. 혈육에만 집착하면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예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자녀에게 세상에서 먹고사는 수단만 가르치면, 결국은 부모가 헛된 인생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온갖 풍파를 겪게 마련인데, 부모에게 신앙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나갈 힘이 있습니다. 믿음 깊은 하느님의 가족이 되면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하늘 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하는 가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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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혈연을 승화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공생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가족 안에서 ‘그 뜻’을 실천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어떤 행동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가족을 ‘자기 뜻대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가족과 부딪히고 있다면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찾는 첫걸음입니다.
가족을 ‘주님의 뜻대로’ 사랑하려면 ‘계산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작은 계산으로 가족을 대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운 부모’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남편의 후광을 얻고 싶어 합니다. 아내의 덕을 보고 싶어 합니다. 가족은 보험이 아니건만 그런 무의식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왜 찾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자고 하셨습니다. 내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법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하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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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애정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하여 종교를 바꿔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인의 마음을 잡으려고 범죄에 뛰어드는 것도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눈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방법대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찰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분의 뜻 안에 있어야 인생의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벗어나면 맹목적인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고통의 원인으로 바뀌고, 남편과 아내가 인생의 멍에가 된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단란했으나 살아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인은 단순합니다. 서로가 자기 방법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공통분모인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부모다울 때 힘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역시 조화를 이룰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제대로 지키는 것도 덕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부모와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혈연관계를 통하여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5,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1-13).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모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남자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지 묵주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관계는 어떤 물질 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실이 하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 어머니를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부모님의 모습
-황지원 신부-
주일학교의 아이들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나게 성가를 부르고 율동을 할
때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친구들의 모습
가운데서 마음에 걸리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친구들의 부모님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어린 친구들의 모습에
그 부모님의 모습이 비추어져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어머니로, 당신의 형제들로 맞아주시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이며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가족의 조건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불리움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내가 누구 집 자식인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밖에 서 있는
- 박후임 목사-
며칠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예수님보다 밖에 서 있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면 될 것을 왜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서 예수님 나오기를 기다리는 걸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 하는 궁금함이 나를 꽉 채운다. 호미질을 하면서도, 일하다가 쉬고 잠시 하늘을 바라볼 때도 문득문득 말씀이 떠오르면 밖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나는 왜 이렇게 그들에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하며 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밖에 있는 그들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나였다.
도시에서 하던 목회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배운지 4년차가 되어 가지만, 아직도 나는 시골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 서 있다.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처럼. 몸으로 농사를 배우는 것, 호미질·낫질·괭이질·씨뿌리고 가꾸고 김매고 순지르고 가지치기 등은 잘 하지는 못해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허나, 시골마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대문도 없고, 방안의 잠금장치 하나 없는 시골마을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생활이 손바닥처럼 다 보인다. 어르신들의 애정 어린 관심이 간섭같아 불편한 마음에 조금 거리를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밖에 서 있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을 보면서 관계에서 오는 불편 때문이 아니라 시골 아낙으로, 농사꾼으로 있는 내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처럼 ‘나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하던 일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뭐. 이렇게 저렇게 다르다고 갈라놓으면서. 결국 스스로 나를 공동체로부터 갈라놓은 것이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예, 주님. 보이는 것으로 나누며 살아가는 제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뜻
-남상근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과 가족이 된다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상관없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이 모든 것에
우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늘 아버지의 뜻은 이렇듯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적인 목적이고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도한다면서도 우기곤 합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도 이것을 원하시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강요합니다. 너무 자주 하느님이 내게
종속된 분이시듯 그렇게 기도합니다.
포콜라레의 금언은 나의 기도가 온전해지려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까? 저도 그것을 원해요.’
내가 하느님께 순명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여 분별없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은혜로운 당신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미사, 아름다운 기도
-임인자-
저는 세례를 받을 무렵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도서관을 그만두고 가장 기뻤던 일은 주일마다 가족과 함께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에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신부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라며 응답할 때는 친구처럼 다정한 신부님을 매일매일 뵐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요! 칠레는 신자 칠만 명당 신부님이 한 분이어서 신부님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평화를 빕니다, 사랑합니다.’라며 서로 얼싸안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어떤 어려움도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입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이 생깁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영성체를 하기 전, 매번 이 기도를 저는 생생한 느낌으로 바칩니다. 제가 성화의 길로 부름 받았음을 느끼는 동시에 함께 있는 모든 교우들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이렇듯 미사를 드리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모든 말씀이 기도이며, 기도 안에서 우리도 함께 거룩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절두산에서 많은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며 지키려 했던 정신과 긴 세월 동안 교우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온 사랑의 정신이 이 미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든 교우들이 저의 형제이고 어머니입니다. 때론 서로 힘들 때도 있고 분란이 생길 때도 있지만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교우이니까요.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샛별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는 정호승님의 시처럼 함께 희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