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간 화요일(마태9,32-38)

2011. 7. 5. 오전 6:42:33

글자

 

2011년 7 5 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마태오 9,32-38)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말씀의 초대

야곱이 야뽁의 강물을 건너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밤새 씨름을 한다. 그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준다. 이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싸우시기를!’ 또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시기를!’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소명과 운명을 표현한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적의 능력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이러한 기적을 행한다고 소문을 낸다. 그들은 가엾은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막혔던 말문이 터진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저런 일을 한다며 빈정거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비웃음과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마귀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하느님 말씀을 잘 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식사 때 감사 기도도 못 바치고,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기조차 꺼립니다. 자신이 없어서 이웃 사람을 성당으로 초대하지도 못하고, 짧은 화살기도를 소리 내어 바치기도 어려워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 것에 사로잡혀서 영적인 것에는 말문이 막혀 있는 것이지요. 정말로 주님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복음 선포가 우리의 사명이라고 확신한다면 사람들의 눈치가 왜 두렵겠습니까? 세상 것이 마음속에 꽉 차 있어서 영적인 벙어리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판 마귀 들린 사람입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 가치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첫 자리에 두고 성령께 용기를 주시라고 청해야 합니다. 이웃과 나누는 대화는 ‘세속적인 대화’에서 ‘영적인 대화’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바꾸면 성령께서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을 낫게 하십니다. 그에게서 악의 기운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달리 해석합니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몰아세우고 싶더라도 지나친 생각입니다. 그들은 기적까지도 비뚤어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오해는 당연합니다. 좋은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했더라도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을 만나더라도 변명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아무튼 바리사이들은 경솔하게 판단했습니다. 차라리 침묵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면 함부로 판단받게 됩니다. 잘 모르면서 비판하면 잘 모르는비판을 받게 됩니다. 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니 늘 좋게 생각하고 선한 쪽으로 판단하려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짧습니다.
말못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의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사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많은 말을 하며 삽니다. 공허한 말이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문제들도 많습니다. 문제들이 많은 만큼 할 일도 태산 같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본당 신부님 대부분에게는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사만을 집전하기에도 바쁩니다.
군종 신부님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경찰 사목에도 신부님들의 손이 모자랍니다. 병원, 학교, 복지 사업 등 사목 현장 곳곳에 목자들과 봉사자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성실한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잘못된 사고와 신념

   시비에 빠지지 말지니

-김찬선신부-

 

정의 관념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자신이건 남이건 용납하기 힘들어 하고 시비를 잘 가립니다.
성격적으로 성향이 이런 사람도 있지만
인격적 미성숙으로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즉 교만으로 시비를 잘 가리는데
남의 시비만 잘 가리고 자기는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비 가림에는 사랑이 빠지기 일수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그러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고
불쌍한 사람이 하도 많아 쉬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시며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시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선행이 옳으니 그르니 따지고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고
적고 있는데 그 군중이 누구에게 시달리고 누구에 의해 기가 꺾였겠습니까?

사람은 없고 법만 있으며
사랑은 없고 시비만 있는 그런 사회는 참으로 팍팍한 사횝니다.
시비로 난도질당한 사람들을 뒤치다꺼리로
주님께서는 치유하러 다니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저는 오늘 이 아침 복음에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시비로 난도질하는 그 사람은 아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삼용신부-

 어제 저녁 한 분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모함당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형제가 어떤 사람의 비리를 조금씩 알아가자 그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사람을 모함하여 더 이상 자신의 비리가 알려지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포티파르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지만 요셉이 그를 거부하자 그가 자신을 겁탈하려했다고 모함하여 감옥에 갇히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이는 것이 살인이 아니라 이런 것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 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가 이런 모함을 당하게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도 억울하여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과 모함을 당하게 되면 더욱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사람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 모함을 했던 사람은 그렇게라도 풀어보려는 형제의 청을 거절하고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모함을 받아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다 제 각각입니다.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저를 모함하여 안 좋게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볼 때는 겉으로는 친절한 척 하지만 그런 것을 볼수록 더욱 사람이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어쨌건 이런 이야기를 하던 형제는 지금 화병으로 심장병이 생겨서 매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용서해야하는 줄 알지만 그것이 잘 안 된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함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도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결국 자신의 결정으로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었지만 자신의 잘못보다는 하와가 자신을 유혹해서 죄를 지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만난 형제를 모함한 사람처럼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양심은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결국 모함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판단하고 모함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며 본인이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한 변화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모함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 입니다.

그런 모함을 당하는 것도 속이 상한데 왜 그것 때문에 몸에 병까지 생겨가면서 그것에 반응해야하는 걸까요? 물론 억울하게 판단 받고 억울한 소문을 퍼뜨려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화가 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흔들려버리는 자신도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만약 남의 판단에 대해 그렇게까지 흔들리고 화가 난다면 내 자신도 나의 명성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4세기 경 수도생활의 창시자 사막의 교부 안또니오 성인의 제자 마카리우스라는 성인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있던 수도원 근처 마을에서 한 여인이 부정한 임신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여인은아기의 아버지는 마카리우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성덕으로 큰 칭송을 받던 마카리우스는 그 여인의 말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웃으며 침묵을 지켰고 노동으로 번 돈을 아이를 잘 키우라며 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결국 여인은 사실을 말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조용히 웃으며 사막의 동굴로 들어가 수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남을 모함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함에 그렇게까지 흔들리는 자신 또한 왜 그런 말에 그렇게까지 흔들리는 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을 못하게 하는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믿었을 것이고 결국 그 사람들의 모함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서이기 때문임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서 담대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결국 나를 판단하시는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알아주시는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아는 척하자

-남상근 신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자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을 눈여겨보시며 제자로 부르셨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팀’을 일구셨습니다.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옮기는 열 걸음보다 열 명이 옮기는 한 걸음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일꾼을 청하라 하십니다. 더 많은 일꾼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맡기실 만한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고 하십니까? 오직 한가지 이유. 그것은 당신께 모여든 이들의 처지가 가엾으셨기 때문입니다. 넋이 빠진 듯한 이들의 모습, 너무 힘겨운 이들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게 한 것입니다.

가엾은 이들을 보고 그분은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른 척하는 것이 죄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배우면 됩니다.
알면 됩니다. 하지만 모른 척하는 것은, 알면서도 아닌 척하는 것은 죄입니다.
나는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입니까? 아는 척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사람입니까?


오직 하나의 꿈

-김순중 수녀-


선을 할수록 “저 사람, 저거 제 힘이 아니지. 얼마 안 가서 쓰러지고 말 거야.”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자신은 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선을 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려는 경우를 수없이 발견한다. 선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 진리의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영신수련에서는 악신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빈정대며 돌아다닌다.
우리의 주님은 일의 결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하더라도 격려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지니라고 하신다. 주님은 지치고 허약한 군중이 가여워 당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신다.
나는 온 우주가 선한 기운으로 가득 차는 세상을 꿈꾼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악이 선한 것들로 치유되는 세상이다.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지극히 작은 선 하나라도 제발 방해하지 말고 그대로 두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양승국신부-


<내 마음 안에 수채화 한 폭>


가난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한 유명인사가 고마웠던 한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잠시나마 아스라이 사라져간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다들 찢어지게 못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도 엄연히 부잣집이 있었고, 가난한 집이 있었습니다. 같은 교실 안에 대지주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소작농의 딸도 끼어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당시에도 엄연히 치맛바람이 있었고, 촌지공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의연하셨습니다. 젊고 패기 있고, 풋풋하고 아리따우셨던 우리 선생님에게 있어 편애란 없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주셨습니다. 코찔찔이든, 부스럼투성이든, 뺀질이든, 그 누구든 그분으로부터 듬뿍 듬뿍 사랑을 한 아름씩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던 교사봉급은 늘 탈탈 털려 모조리 아이들 간식비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자상하셨던지, 얼마나 따뜻하셨던지, 얼마나 화사하셨던지 모릅니다. 그분의 손길이 머리에 제 머리에 잠시라도 닿는 순간은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교할 때가 제일 슬펐습니다.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요. 집에 돌아가면 늘 선생님 생각만 했습니다. 밤마다 빨리 날이 새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빨리 학교 가서 선생님 얼굴 뵐 생각에.


선생님은 정녕 가난한 우리들 마음에 따스한 한 줄기 햇살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삭막하던 우리들 마음 안에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을 그려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운 선생님의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참 교사 한분으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행복했던 것처럼,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 찬 착한 목자 한 분으로 인해 수많은 양떼가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가까이 내려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얼마나 서글프고 끔찍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때로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상처가 너무나 아려서, 또 혹독해서 말을 잇지 못합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동반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입니다.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심연의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험난하고 고통스런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이 마음 안에 사제성소나 수도성소가 활활 불타오르는 것, 이것처럼 뚜렷한 하느님 현존의 징표는 없다고 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불타는 많은 성소자들이 기쁜 얼굴로 주님의 포도밭으로 달려오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참 목자, 그래서 결국 양들을 위해 자신을 하루하루 소멸시키는 착한 목자가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자살을 결심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활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가족과 함께 이런 상태로 계속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소개받은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어요.

“전 정말 힘듭니다. 어서 빨리 죽고 싶습니다. 집이 정말 지옥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내일 당장 죽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한 달만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의미 있게 죽는 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평소처럼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 말고 일주일 동안 퇴근 후 바로 집에 들어가십시오. 단, 과자든 장난감이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한 가지씩 사 가십시오.”

남자는 이제 한 달 후면 죽을 건데 그것쯤이야 하고 일주일 동안 실천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자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집 안에 있는 당신의 물건을 깨끗이 정리하십시오. 하는 김에 아이들의 물건, 아내의 물건도 깨끗하게 정리해주면 더 좋겠습니다.”

남자는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일주일 후 이번에는 지혜를 가진 남자가 이렇게 요구했어요.

“이번에는 부인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한 턱을 내보십시오. 이제 죽을 목숨인데 돈이 뭐가 아깝습니까? 장인 장모, 부인 친구에게 식사 대접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요구한 것을 눈 딱 감고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났지요.

“자, 이제 마지막 요구입니다. 이번 일주일만 지나면 당신은 편하고 의미 있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일주일 후에 죽어도 아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이런 말을 해 주십시오. ‘당신은 좋은 아내였는데 나는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 남은 일주일 동안 아내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주십시오.”

그는 그것만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성실하게 실천했습니다. 4주가 마무리되고, 약속한 한 달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은 날. 남자는 지혜를 가진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해요.

“죽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은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 얼굴엔 웃음꽃이 피고 있습니다. 우리 집의 행복은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것입니까?'

“지난 4주 동안 당신이 만든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랬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집이 지옥이 된 것은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야 또 알겠습니다. 가족이야말로 진정한 천국이라는 사실을.”

긴 이야기였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남 때문에, 가족 때문이 아닌,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 탓만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인들은 이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해하며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지요. 그래서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 오히려 내 안에 마귀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귀는 긍정보다는 부정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사랑보다는 미움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다툼과 미움으로 마귀에게 지는 오늘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과 용서와 사랑으로 마귀에게 승리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수많은 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영혼의 눈’이다. 진실은 영혼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플라톤).

 

일꾼다운 일꾼이 되기를

  -반영억신부-

청주교구 황간 성당이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성당내부와 집기들이 불에 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방화용의자로 보이는 젊은이를 붙잡아 조사 중입니다. 자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언덕에 보이는 성당에 와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하니 정신적으로 아픔을 겪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황간 성당 신부님과 교우들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픔을 겪는 이들이 신앙을 통하여 그 아픔을 이겨내고 위안을 받으며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군중들에게 기쁨을 허락하셨던 것처럼 사제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시련과 역경으로 좌절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추수를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추수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더 큰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일꾼다운 일꾼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기적을 본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놀라워하는 반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폄하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실을 보고 받아들일 때 사실 그 자체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이나 마음에 따라 달리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멸시와 비웃음을 보냈던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과 신념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 중 문제가 될 수 있는 사고는 나는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과 나는 중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마귀 들린 벙어리를 고쳐주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폄하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나는 중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명예욕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빼앗겨 백성의 존경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마도 예수님의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비난하게 하는 내적 작용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을 보면서 묵상해야 할 사실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난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부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 주위의 선한 일들을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마음

- 강석진 신부-

 오늘 복음 내용은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왔고 , 그에게서 마귀가 쫓겨나가자 그가 말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리고 그 치유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양분되어 나옵니다 . 먼저 군중의 반응은 , 다들 놀라며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고 합니다 . 사실 그들은 맞는 말을 했고 , 제대로 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 아니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는 이들, 곧 정말 말도 잘했을 바리사이들은 그 치유를 생생히 보면서도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 입은 있지만 제대로 된 말은 할줄 모르는, 어쩌면너무나도 말 잘하는 마귀가 들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의든 타의든 말 못하는 사람의 답답함은 무척 클 것입니다. 말은 관계 형성을 위한 의사소통의 도구이기에, 말 못하는 사람은 관계 형성에도 큰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말하게 되는 치유 과정을 목격했다면 사람이면 의당 축하할 일이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일이며, 제대로 된 말을 함께 주고받으며 풍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에 어깨춤이 절로 날 일입니다.
하지만 본연의 인간다운 양심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아픈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병든 마음이며, 예수님 시대의 표현으로 한다면 마귀 들린 마음이겠지요. 마음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나의 마음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 듯하지만 마귀 들려 있는지 말입니다. 말 못하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은 분명 말만 잘하는 마귀 들린 사람도 치유해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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