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마태오 11, 25-30)

2011. 7. 1. 오전 6:27:11

글자

 

2011 7 1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오 11, 25-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light."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고 우리 삶 속에 그분의 사랑을 새기는 날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그 이유는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로마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사제 성화의 날은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게 하려고 정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묵상합니다. 또한 사제들이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사제가 되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성체성사의 사랑이 교회의 사제들과 우리 마음에 불타오르도록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오로지 주님께 봉헌된 백성이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율법을 실천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진실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제1독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죄 제물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 머무르며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제2독서). 누구나 삶의 등짐이 있고 멍에가 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예수님께 배우고 성실히 살아가면 어느덧 짐은 가벼워지고 멍에는 편해진다.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린 송아지가 어미젖을 갓 떼고 나면 목에 고삐를 매어 끌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얼마쯤 자라면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걸게 됩니다. 힘이 세진 송아지를 다루기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 반쯤 지나면 소는 멍에를 메는 훈련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짐을 나르다가 멍에에 익숙해지면 본격적으로 크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논밭을 갈게 됩니다.
이렇게 일소가 되어 죽을 때까지 워낭을 달고 멍에를 메고 일을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농촌의 풍경이지만 지난날 우리 농촌의 일소들은 순하고 충직하게 자신의 멍에를 메고 일생을 하루같이 일하며 살았습니다. 일소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냅니다. 이로써 일터와 사람과 떼려야 뗄 수없이 엮여 있던 삶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렇게 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일소가 코뚜레를 걸고 워낭을 달고 살듯, 자신의 삶의 멍에를 묵묵히 메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의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낼 수 있을까, 사는 동안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나아갑니다.
어느 누군가는 요즘은 눈치 빠르고 남을 속이며 약삭빠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삶의 멍에를 메고 소처럼 정직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진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연과 사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하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

 

어느 집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잘 보이는 동편에 오동나무를 심었습니다. 딸이 걷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란 오동나무를 잘라 버립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이상하였습니다. ‘그럴 바에야 심지를 말지.’
그러나 오동나무는 다시 자랐습니다. 잘려 나간 자리에 싹이 돋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또 잘랐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너무 진지한 모습에 입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동나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늘을 향해 자라났습니다.
혼기가 찬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딸의 나이와 똑같은 그 오동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완전히 베어 버렸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시집갈 딸의 장롱을 만들어 주며 말하였습니다. “얘야, 두 번 잘라 준 다음 자란 오동나무야말로 진정 단단한 재목이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란 나무는 속이 비어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단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먹을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먹고 자란 자식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마음

 -반영억신부-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3,16-19)

 

예수님의 성심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좀 더 가깝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높으신 분이지만 그 높음을 차지하지 않으시고 낮아짐으로써 겸손의 모습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 대한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한 없이 낮아지는 겸손과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순종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뿐 아니라 부모님께 대한 순종의 삶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며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우며 지냈습니다. 각 가정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면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소유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있고 자녀는 자녀의 몫이 있습니다. 아내는 아내로써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대거나 대신 해 주기를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순종하는 마음을 닮기를 희망합니다. 

 

순종하려면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인간이나 하느님 앞에서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정말 겸손한 사람은 그 무엇에도 초연해 합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듯이 나의 이웃이 커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12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됨됨이를 보면 모두가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혁명당원이 있었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가 있었으며 훗날 예수님을 팔아먹을 배반자 유다도 거기 있었습니다. 남들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친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모든 이의 속을 꿰뚫어 보면서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껴안으신 품이 크신 예수님이십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오직 자비와 사랑으로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족, 이웃을 보면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감히 내가 남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를 품지 못하는 못난 내 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고 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거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바라보지 않고 어떻게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으며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성심은 깊은 사랑의 연못입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예수님의 심장을 항상 바라보고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마태11,28-29)하시는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진정한 쉼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조명준 신부-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멍에가 씌워진 소나 말은 결코 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가 편하고 당신의 짐이 가볍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신학교 시절 동료 신학생이 영성지도 신부님에게
선물로 받았다며 보여준 작은 이콘 속에 담긴 그림이 아직도 인상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 그림은 ‘엘 그레코’라는 스페인 화가가 그린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절망과 고통이 아닌 희망과 광휘로 가득합니다.
십자가를 항상 고통스럽고 힘든 것으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그 그림은
사랑으로 안고 가는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과 시련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자녀들을 위한 온갖 수고와 희생을 사랑으로 기꺼이
지고 가는 부모님들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예수 성심과 묵주기도

- 이상각 신부(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성지에는 야트막한 야산을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지름 0.7미터 크기의 돌 묵주알이 4.5미터 간격으로 20단이 놓여 있다. 이곳에 찾아와 묵주기도를 드리는 순례자들은 단순히 묵주알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두 팔을 활짝 벌려 묵주알을 끌어안거나 마치 속삭이듯이 묵주알에 고개를 묻고 기도드리곤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는 언제나 묵주기도를 바쳐왔습니다. 저의 모든 근심을 묵주기도에 의탁했으며 그 안에서 저는 언제나 커다란 위안을 얻었습니다.”(「동정마리아의 묵주기도」 1항)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많은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묵주알 한 알 한 알에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말씀드리며 위안과 평화를 얻는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 생애의 스무 가지 신비를 묵상하게 된다. 묵주알 한 알 한 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비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다 보면 성모님은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고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고통 받고 죽으셨는지,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셨는지를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마음에 펼쳐 놓으신다. 그 그림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든 말과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그분들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만남은 우리 마음에도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며 또한 우리가 그분들을 본받도록 이끈다. 이처럼 묵주기도는 우리를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우리와 그분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다.

묵주기도 20단 신비 안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성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묵주알 한 알 한 알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해주신 사랑을 일깨워 주며 그 사랑의 선물에 감사하게 하고 우리 또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쳐 달라고 요청하셨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모욕을 안겨드리는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가 예수님과 성모님께 드리는 장미꽃다발이다.

 

 

인간 사랑과 구원의 상징인 예수성심
-
경규봉 신부-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믿었기에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이 교회 안에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고, 특히 보나벤뚜라(1220-1274), 메히틸다(1241-1299), 젤뚜르다(1256-1302)와 같은 성인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예수성심께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예수성심 공경이 세계적으로 보급된 것은 프랑스의 방문회(The Visitation Order) 수녀인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내리신 예수성심의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2년 반 동안 성녀에게 70회나 발현하시면서 예수성심 축일 제정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당신 성심에 관한 것을 계시해 주셨다.

1856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예수성심 공경을 권장하면서 예수성심 축일을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축일 설정 100주년인 195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예수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Haurietis aquas)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하였다.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신앙고백 그 전부이다.”라고 하였다. 예수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우리 죄로 인하여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창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성심은 속 깊이까지 열려, 그 자비의 깊은 현의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드러났다.”고 말하였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렸음을 믿었고,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늑방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고백하였다.

성 보나벤뚜라는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교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419, 37)라는 성서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聖意)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심장)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 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다”(생명의 나무에서)고 말했다.

예수성심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늑방(심장)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보이시고 교회를 구원하셨다. 피와 물이 흐르는 심장은 곧 인간 사랑과 인간 구원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들은 예수성심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다지고 많은 냉담자를 회개시켰다.

오늘 예수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를 깨닫고 알기 위해 주의 생애, 수난, 성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의 성심을 사랑하도록 힘쓰자.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니 성체 앞에서 조배드리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공경하자.............

 

 

예수 성심
-
김율석 신부-


"누구는 마음이 좋다" 또 "누구는 마음이 고약해서 가까이 갈 수도 없다" 할 때, 그 "마음"이란 공부하는 책에서나 나오는 말이거나,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우리 모두의 제각기 다른 살아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란, 한 인간의 성품의 샘이고, 행동의 바탕이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씨는 어떠하며, 어떤 마음을 바라고 있습니까? 아마 내게 실수가 있을 때 상대방은 나에게 용서해 주는 마음, 아량이 넓은 마음을 바라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이해해 주는 마음, 힘들 때는 도와주는 마음을 베풀어주었으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보다는 겸손한 마음을, 거친 마음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좁은 소견에 이기심 가득 찬 마음보다는 무엇인가 헌신적이고 봉사해 주는 마음을, 사랑이 메마른 각박한 마음보다는 없는 속에서도 오고 갈 수 있는 정이 가득 찬 열린 마음을 더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는 마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남에게 바라기 전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마태오복음 11장 29절에서 표현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보면, 성부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순명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향대로 행하심이 당신의 음식이라고 하시면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루가 9,10), "생명을 해하러 오지 아니하고 오직 구하기 위하여"(마태오 18,1), "심판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주기 위하여"(요한 12,47),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또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시면서"(요한 10,10) 우리를 대하시는 마음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버려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메시는 마음이시며, 탕자를 찾으시며 조건없이 기꺼이 맞아들이시며 기다리시는 마음이며(루가 15장) 또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마음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당신을 찾고 회개하는 죄인을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죄악중의 막달레나를, 탐관오리 중의 자캐오를 그렇게 대해 주셨고, 나임의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셨고, 당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눈물을 흘리셨으며,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당신 목숨까지 우리 죄의 속량물로 내어주신 마음이며, 성체 성사 안에서 이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밀떡과 포도주 형상으로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 말씀들을 듣고 봄으로써 예수가 누구인가를 체험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힘있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예수님 앞에 안심할 수 있고 다시 힘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찾고 받을 수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을 우리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하겠고,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표현

- 이봉하 수사-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 증인이 없는 경우 해당 사건은 미궁에 빠지거나 사건 해결에 장시간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증인을 확보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기록하고 해결해갑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사건이든 증인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정,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당시의 명망가들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간혹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 중에서도 바른 증언을 한 사람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은 군인들입니다. 당시의 사회구조상 군인들도 백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군대라는 특수 집단의 속성상 권력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건 앞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바른 증언이 아닌 위증을 하였을 것이지만, 복음에 나오는 군인은 이름 없는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그 사람의 증언이 성경에 기록되고 ‘증언’이 ‘참되다’라고 반복을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모순된 증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 중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군인의 용기와 증언은 오늘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의 샘

-조욱현 신부-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 요소로서 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늑방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늑방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늑방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의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대축일로 지내오고 있다. 이 날은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에로 나아가도록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무리들이다.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시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 당신의 아들 자신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실천하면, 그만큼 큰 기쁨과 위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려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열절한 사랑의 샘

-김귀웅신부-

 

어느 청년이 아름다운 한 아가씨를 너무나 사랑했다지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독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였다지요. 아가씨는 청년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야겠다며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하였다는군요. 아아,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 말대로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 손에 들고는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달음질쳐서 아가씨에게로 향하였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지요. “얘야,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자기를 죽인 못난 아들에게조차도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마음은 결코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군사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을 때 그 피와 물로 온 세상의 죄를 다 씻어 없애고 싶으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애타 하셨던 분, 그래서 밤이 새도록 밀려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손을 대어 고쳐주셨던 분. 그분은 열절한 사랑의 샘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는 삶으로

-이기양신부-

 

교회는 6월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聖心)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로 정하여 성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인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바라는 뜻에서 우리 천주 교회에서는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한 것 같습니다.

사제들의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에서 살고, 또 사목을 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지요.

저는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참으로 좋은 공동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목자와 양이 평화롭게 살수있는 공동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에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이 있으며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가 함께 있습니다. 그 작은 나라에 어떻게 전혀 다른 성질의 호수와 바다가 공존하는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이스라엘을 찾아가다 보면 누구나 깜짝 놀랄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죽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오아시스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끝도 없는 사막에서 어느 순간 오아시스로 바뀌는 장면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갈릴래아는 바다라고도 불리지만 민물로써 분명 바다가 아닌 호수입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골란고원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두 받아서 호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호수는 고기들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곳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은 제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물고기가 많고 새들이 많으며 땅이 비옥한 이곳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명이 넘치는 휴양지로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사해는 많이 떨어져 있지 않지만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지요. 염분이 많아서 수영을 못해도 가라 않지 않으며 그 주변에는 풀도 거의 자라지 못합니다. 대단히 삭막한 그곳에서는 주변도 같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방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서 누구나 사랑하는 생명의 호수가 되고, 사해처럼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골란고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다시 요르단 강으로 흘려 보냅니다. 넘치는 경우가 없지요. 계속해서 받아서 다시 내려보내고, 받아서 보내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에 반해서 사해는 요르단 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만 합니다.

저지대에 있는 사해는 물이 새어나갈 틈이 없습니다. 받는 대로 모두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물은 계속 증발하기만 할 뿐 흘러 내려가는 것은 없습니다. 계속 고여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삶과 죽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살고 움켜쥐면 죽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명확하지요.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는 열쇠는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끊임없이 나눌 때 그때 나는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이며 넘치는 은총을 받는 것이지요. 나누면 나눌수록 생명은 넘쳐납니다.

우리 시대가 갈수록 죽음의 문화에 휩싸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이 되며, 모두가 외로움 속에 헤매는 이유는 너나 없이 움켜쥐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녀간에도, 형제간에도 나눌 줄 모르고 움켜쥐기만 하여서 모든 관계는 생명을 나눌 줄 모르는 무덤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요.

옛날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 부모와 형제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던 그 시절은 상생의 문화와 생명이 흘러 넘치는 정겨운 시대였지요.

이것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만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 서로 사이좋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애 있는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나누면 되는 것이지요. 칭찬과 격려의 말을 나누고 배려와 인내심을 나누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제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신자들이 함께 따라 할 때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저는 여러분께 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며 살아가자고 다시 한 번 제안합니다. 누구나 가고 싶고 누구나 머무르고 싶어하며, 편안하고 생명이 넘치는 공동체를 우리는 이룰 수가 있습니다. 나누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한 공동체를 위해서 목자는 헌신하고 또 헌신하는 목자를 위해서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우리 모두의 기도 속에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 성장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묵상 / 이태석 신부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세

 

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난 영원히 기도

 

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사랑하리라사랑하리 서로 사랑 서로 사랑 사랑

하여라

 

이태석신부님이 작사 작곡하신 '묵상' 을 주제로 가톨릭 시니어 아카데미 제벨라뎃다님이 만드신 영상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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