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19일 삼위일체 대축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18)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ight not perish
but might have eternal lif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께서 사랑과 용서의 주님이심을 전하신다. 곧 주님께서는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분으로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이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기뻐하고 서로 격려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당부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이름으로 편지를 끝낸다(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복음).
오늘의 묵상
하루에 몇 번이나 십자 성호를 긋는지 세어 본 적이 있는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십자 성호를 긋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에도 성호를 그으며 시작하고 마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형식은 조금 달랐지만 십자 성호를 긋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십자가의 은총을 우리 안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며 그분 사랑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한순간 한순간 십자가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삼위일체이신 그 사랑의 하느님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겠다는 다짐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삼위일체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어 자신은 무(無)가 되어서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성부와 하나가 되신 것이 삼위일체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호를 그으며 주님을 초대하는 것은 주님을 손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비우고 없애 대상이신 삼위일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3에다가 1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삼에다가 1을 곱해서 다시 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그때마다 성삼위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는 연습을 하면 어느덧 ‘나’는 없어지고 ‘사랑’이신 그분만 남습니다. 내가 온통 사랑하는 존재가 될 때 내가 날마다 수없이 바치는 ‘성호경’은 나를 통해 완성됩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한다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사랑하는 자녀가 하느님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는지요?
오늘 복음은 그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지극히 간단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오신 하느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적어졌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반응에 대해서는 적극적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부하면서도 집을 짓거나 차를 사면 고사를 지냅니다. 좋지 않은 일이 없기를 비는 것이지요. 재앙이 두렵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모른다고 하면서 그분의 힘과 권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서 좋지 않은 일을 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외아들을 보내 주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불안한 것은 사람들의 탓이지 하느님의 간섭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잘못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하느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복음말씀을 인용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구절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더군다나 영생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시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계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빚어 만드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만드시는 분의 손이시며 성령은 빚어 만든 흙덩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며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며 또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1-22) 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례 때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20)고 하시며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16,14)하시며 역시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14)하셨는데 요한 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아들과 성령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무한히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아들은 무한히 수용하는 사랑을 성령께서는 무한히 자신을 남에게 연결하고 전달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 움직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를 도우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가 사랑 안에서 확인되고 체험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이 행하게 되고 주님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향합니다. 모든 이를 향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 죄인들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너무나(이런 식으로) 사랑한 하느님 이십니다. 십자가에 목숨을 내 놓기까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7-18)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심판의 역설을 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3,19-20)
결국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빛을 거부한 인간자신입니다. 이 말은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입니다. 구세주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살았듯이 십자가에 높이 들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명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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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살며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답니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들의 불평, 불만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체면이나 기념일, 불평불만을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살아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성체를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기양신부-
천주교 신자들은 모든 것의 시작과 마침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호경으로 합니다. 어떠한 하느님을 믿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인생관이나 나라의 문화가 달라집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사랑으로 일치되어 계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이 당신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내치실 때에도 애뜻한 마음으로 가죽옷을 입혀 주시며(창세 3,21) 안타까움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죄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시고자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은 꺾이지 않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몇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마음을 송두리째 배반하고 떠난 아들을 날이면 날마다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기적과 말씀을 통해 드러내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하느님께 외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증명해 주셨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제자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사랑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하고 강하게 사랑의 삶을 강조합니다.
결혼 전 간호사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에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녀인 듯 보였습니다.
"아주머니, 진료가 시작되려면 아직 좀 있어야 하는데요. 선생님도 아직 안 오셨구요."
내 말에 두 모녀가 기다리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마주 보았습니다. 업무 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긴장된,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잠시 후 원장선생님이 오시고 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습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얘…가 제 딸아이예요. 예…날에…러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다행히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네요.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 될 녀석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보잘 것 없고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에미의 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도 접합 수술이 가능한지요?"
그 순간 딸도 나도 그리고 원장선생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말했습니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모녀와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어머니의 손가락」-한 전직 간호사의 글).
이것이 세상 어머니들의 마음이라면 하느님의 마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안병철신부-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 16). 이렇게 요한복음 저자는 당신 아들을 선물로 주시는 사건 속에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명되었음을 지적해 줍니다.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우선적으로 인간 실존의 완전한 구현 내지는 충만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 실존의 완전한 성취란 사랑을 통해서 얻어지게 됩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실존을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 실존은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인간 실존은 개방되고 개화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우리를 어떻게, 어디까지 사랑하고 계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랑에 참여케 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표명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처벌을 받거나 단죄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고 생명의 원천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격리시키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미천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하느님께서 그런 사랑의 선물을 베풀어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뿐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16절).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선물을 다 주셨고,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의 전인적인 응답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이 나설 차례요, 응답해야 될 때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이성적 논리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인 응답을 통해 그 심오한 의미가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의 신비를 밝혀 줄 수 있는 사랑의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우리는 하느님께 깨달음의 영을 청해야 한다.
- 정복례 수녀 -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6-18)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면 의인으로, 믿지 않으면 죄인으로 판결을 받는다. 그러니 하느님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리라.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모르기 때문에, 또는 알면서도 의지가 약해서. 오늘 복음은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신다. 죄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박약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무지, 신적인 일에 무지한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신적인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신지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의 영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 중 하나이다. 깨달음의 영이 함께 할 때 주님의 신성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생각을 비춰주시고 이끌어 주시어 신적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 진리이고, 그를 알게 될 때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이다. 진리의 빛으로 인도될 때 하느님께서 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어느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터득하여 자유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한평생 걸려 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한 영역으로서, 깨달음의 영으로 인도될 때 비로소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깨달음의 영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적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고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마땅히 죄인으로 판결받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