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5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16-20 )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from all nations.
Baptize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 them to fulfill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is world."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이 힘을 얻어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신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곧 성령과 교회의 시대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교우들을 격려하고 앞으로 받게 될 하늘 나라의 상속을 떠올리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당부한다(제2독서). 주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감하시며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전해 주신 것을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릴 적에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은 늘 저 멀리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무한한 거리에서 빛을 밝히는 별을 바라보며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영원성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주에서 거꾸로 지구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구에서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은 그야말로 한 점 푸른빛을 내는 작은 별이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는 것은 마치 탁상 위에 작은 지구본을 올려놓고 바라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구 표면에 사는 사람을 관찰하려면 다시 수십억 배로 확대할 수 있는 현미경으로 보아야만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잘났다고 키 재기를 하며 사는 세상이지만, 사실 먼 우주에서 바라본 우리는 이렇게 현미경으로도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생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한 점 별이지만,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지구는 하늘의 한 중심에 있게 됩니다. 지구 위에 사는 사람도 광활한 우주 저 멀리에서 보면 존재 자체마저 가늠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존재이지만, 반대로 지구의 한 점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온 하늘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감싸여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우주 저 멀리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온 우주를 품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점 작은 별에 사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이지만, 하늘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다시 우리는 온 하늘을 품고 사는 가장 큰 존재가 됩니다. 주님 승천의 의미입니다.
★★★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는지요? 예전에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대기권을 뚫고 하늘 저쪽으로 가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화 같은 표현입니다.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으로서는 당연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표현 그대로를 내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승천입니다. 교리적인 해석을 하자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이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언젠가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승천의 교훈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것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욕망에 정신을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세상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닌 탓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마태28,16-20))
믿고 감당할 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하늘 나라로 올라가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각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 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을 보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 하시며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16,15-18)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여전합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어 봐라.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의 흉을 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걸려 넘어지더라도 그래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을 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19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무슨 말을 듣거든 마음에 묻어라. 어리석은 자는 무슨 말을 들으면 옮기지 못하여 산고를 치르는 여인처럼 고통을 느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니게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말을 옮기지 못하면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양 못 견뎌 한다.” 하고 말합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가벼운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야훼께서 뱀에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뱀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그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된다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때 사용하는 복되신 동정성모마리아 상을 보면 어머니께서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미사 안에서 영성체 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1,11)는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성당 교리 시간에 늦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왜 늦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길가에 돈을 떨어뜨렸어요!” 오 그래, 돈을 주워드리느라 늦었구나! 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할아버지께서 가실 때까지 제가 밟고 있었어요!”. 좋은 일 만큼이나 나쁜 일 하기도 힘이 든답니다.
기왕이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제자리찾기운동본부'
-박용식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땅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전합니다. 마치 고무풍선이나 수퍼맨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설명했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 예수님이 영적 존재인 하느님의 위치로 복귀하셨다는 뜻으로 묵상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완전하고 전능한 하느님이셨는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셔서 33년 동안 인간으로 사시다가 하느님 위치로 원상복귀하셨습니다. 즉, 원래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 승천의 의미라고 묵상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제자리를 바꿔 놓는 바람에 자연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불행하게 됐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름철에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는데, 그 원인이 바로 둑을 쌓음으로써 물길을 억지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랍니다. 4대강 사업이야말로 물이 흘러야 할 제자리를 막는 것 같아 심히 염려됩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제자리입니다. 눈, 코, 귀, 입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얼굴입니다. 그렇지 않고 뒤통수에 붙어있거나 손, 발, 무릎, 허리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붙어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리를 떠난 것은 하루 빨리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망치나 송곳 등 연장을 사용한 후에도 연장이 있던 제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찾기 쉽고 사용하기에 편리합니다. 특히 낚시꾼은 낚시 바늘이나 줄 등 낚시 도구를 제자리에 잘 정돈해야 엉키지 않고 찔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습관을 길러줘야 합니다.
사람도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는 가정인데, 만일 다른 여자와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면 제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제자리입니다. 학생의 제자리는 교실이나 책상 앞이고, 직장인이 근무시간에 있어야 할 제자리는 근무처입니다.
신자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주일에는 성당이 바로 있어야 할 제자리입니다. 주일에 성당에 가지 않고 극장, 낚시터, 운동장, TV 앞에 있는 것은 모두 제자리를 떠나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마치 눈, 코, 입이 제자리인 얼굴에 붙어있지 않고 뒤통수에 붙어있어 흉측스러운 것과 비슷합니다.
신부인 저도 제자리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쉬는 날도 아닌데 낚시터에 있었으니까요. 신부가 있어야할 제자리를 떠나 낚시터로 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마치 죄인인 듯, 떳떳치 못한 마음으로 신자들 몰래 낚시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바꾸어 놓는 바람에 세상이 뒤죽박죽 뒤엉켜 자연도 인생도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뒤엉킨 세상을 풀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래서 제자리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리찾기운동'을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그 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뽑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사명을 이어 받은 우리 교회도 예수님처럼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제자리찾기운동본부'라고 불러봅니다. 새마을운동, 쓰레기줄이기운동, 칭찬하기운동이 있듯이 제자리찾기운동을 교회가 주관하고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고 행복함을 알기에 우리는 자연이 있어야 할 제자리,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 신자로서 있어야 할 제자리를 꼭 지키도록 합시다.
제자리찾기운동의 사명을 받은 우리는 어떤 유혹 앞에서도 있어야 할 제자리를 떠나지 말고 꼭 지킵시다.
예수님은 왜 승천하셨을까?
-최인각신부-
주님 승천이 주는 우리의 기쁨
교회는 예수님께서 구름에 둘러싸여 하늘로 오르신 것을 큰 축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분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는 무엇일지, 그리고 교회는 왜 오늘을 홍보 주일로 정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도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최후의 심판 때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궁금증은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 궁금증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저 인간들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하오니 제가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힘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겠습니다”라고 청하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그래, 아들아. 참으로 네가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그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이들과 아직 지상에 있는 이들을 다스리도록 하여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기 때문에, 잘하리라 믿는다. 나는 좀 쉬겠다”라고 응답하시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기뻤던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나를 바라보시고 마음을 다해 애쓰시는 예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위해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니, 큰 행복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나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하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나누어 많은 이가 체험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그 도구(매개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면서, 요즘 매스 미디어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잘못 활용되고 이용되는 부분의 정화를 위해 기도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함을, 매스 미디어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그리고 이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어떤 학생이 ‘예수님은 참다운 매스 미디어 자체이시다’라는 말을 꺼냈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TV이시다’‘예수님은 기꺼이 전파(電波)가 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전파를 보내시는 분이시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전하고 나누는 또 다른 ‘매스 미디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하시는 예수님께 감동을 받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나 자존심, 명성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신 예수님, 정말 멋쟁이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물’[水]에 비유해봅니다. 담긴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물처럼, 우리를 한없이 유연하게 대하시고 우리 상황에 맞게 가르치시는 예수님.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삶에 그늘지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 목마른 사슴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물처럼, 지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 거침없이 용틀임하며 바위를 부수고 산을 넘어뜨리는 바닷물처럼, 불의에 항거하시는 예수님. 숨어서 온갖 식물을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하는 물처럼,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예수님. 서로 엉겨서 드넓은 바다를 향해가는 물처럼,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오늘은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 사실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뻐 손뼉을 치고 환호하며 나팔소리 울려 이 사실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어디에?
오늘 우리들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아니 하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 하늘이 무엇일까?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땅에 서 있는 사람한테 하늘은 머리 위에도 있고 오른편에도 있고 왼편에도 있고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고 마침내 아래에도 있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하늘은 땅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 하늘은 어떤 형체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서 그냥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없는 건 아니다.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있는 것, 하늘은 그런 것이다.”
하늘에 대해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곳에, 앞에 뒤에 위에 아래에 좌우에 온 세상 가득 찬 모든 것의 안팎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그러므로 우주선처럼 우주 하늘 위로 날아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머리 위 저 꼭대기 어딘가로 공간적인 장소를 이동하여 올라 가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늘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언제나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이제 그분이 더 이상 때와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당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겁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듯 예수님이 오르셨던 하늘, 그 하늘나라 역시 어떤 장소나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혹은 단순히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막연한 생각 속에 있는 피상적인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의 현실과 연결된 아주 구체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실천되는 곳에 하늘나라가 있으며 그곳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우리 가운데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할 때, 서로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서로에게 기쁨을 전하고 사랑을 전할 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