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토요일(요한 15,18-21)

2011. 5. 28. 오전 5:57:14

글자
 
 

2011 5 28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
요한
15,18-21)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and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복음 선포의 협조자로 선택하여 함께 고을을 두루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선포한다. 교회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점점 늘어난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의 모습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권력과 사람들에게 받을 온갖 박해를 미리 예고하신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 편에 선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곳곳에 교회가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생겨난 초대 교회는 문화적 정치적 이유로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제자들이 돌팔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때로는 순교를 하기도 합니다. 초기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자신들을 뽑아 주셨기 때문이라 여기고, 박해가 심해질수록 자신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욱 깊게 가졌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도 이렇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현존하는 문화를 거슬러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사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사도 2,44-47 참조). 이것이 우리 교회의 첫 모습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대조를 이루는 사회입니다. 세상이 온통 권력과 부를 좇을 때 이를 거슬러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헛된 영예와 쾌락을 추구할 때 이를 거슬러 정의와 순결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물결과 함께 떠내려 가는 교회가 아니라, 물결을 거슬러 교회의 원천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교회를 만드는 예수님의 지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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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분의 뜻을 당신의 생명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이런 모습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훗날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것은 스승님의 말씀과 행동이었지, 다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단순한 이 모방은 현실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길잡이가 됩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가치관이 있습니다. ‘물질과 소유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위치로 치닫고 있습니다. 젊음과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위해 숱한 조직과 정보가 쾌락주의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공공연하게 실용주의를 표방합니다. 최고의 가치는 나에게 유익한 것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신앙인을 지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너무 쉽게 세상 판단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성급한 출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제자들의 처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은총의 이끄심에 맡기려는 시도입니다. ‘내가 너희를 뽑았기에 너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삶이 힘들수록 복음 말씀을 기억하며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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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입니다. 믿는 이에게 박해는 당연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박해를 싫어합니다. 반대만 해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대를 넘어 박해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화산은 활화산과 사화산이 있습니다. 활화산은 언제 터질지 몰라 위험하지만 주변에 온천을 만듭니다. 질이 좋은 온천수를 제공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화산에는 위험도 없고 온천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냥 구경거리가 될 뿐입니다.
신앙은 살아 있는 활화산이지 죽은 사화산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은 믿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봉헌과 공부가 없으면 신앙 역시 삶의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에 부담을 주는 거룩한 장식으로 바뀝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이 부담스럽다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신앙생활이 귀찮은 이유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현대의 박해입니다. 오늘날의 박해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기도가 생명입니다. 기도가 없기에 주님께서 힘을 주셔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성당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무심코 왔던 성당이 하느님의 힘을 받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언제라도 성당에 오는 첫 목적은 기도이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반영억라파엘신부-

구역모임에서 한 형제님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고 10년 전의 메모를 읽어주셨습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선의 하느님께서는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사랑합니다.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김두유 신부 -

 

어느 덧 부활 제5주간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기쁜 생활이 되시기 기도합니다.
  여러분들께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본당에서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들어보면 신앙생활이 ‘쉽다.’ 또는 ‘행복하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제가 ‘확신에 찬 대답’이라고 미리 못 박아 놨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는 오늘 복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세상의 물정에 쉽게 물들어서 예수님과 자꾸 멀어지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나의 실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삽니다. 성당에 있을 때만, 주일에만 신앙인으로 자처하고, 나의 실생활에서는 신앙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나의 실생활’과 ‘나의 신앙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실생활을 사는 것도 ‘나’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나’이기에 실생활과 신앙  생활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내’가 온전한 삶의 자리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포함과 불포함의 관계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실생활과 신앙생활을 동일시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바리사이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함, 즉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지금 여기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역시 속해 있는 삶의 자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논리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예수님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 존재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면서 신앙인답게 처신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된 것이 아주 부끄럽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이 자기 사람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고 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돈에 사로잡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답게, 세상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외면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어둠이, 세상이,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보장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시작과 끝

 -노성호 신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올바로 이해하고 대응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해석하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참으로 쉬운 것은 아니구나 싶지만, 하나의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질 땐 참으로 난처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오해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오해를 풀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가만히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겠다 싶기도 하지만, 오해의 싹을  씻어내고 좋은 관계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참으로 알고,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채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오해하면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의 삶을 얽매는
걸림돌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구원의 역사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크신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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