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9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요한 13,16-20)

말씀의 초대
바오로 일행이 안식일 회당에서 설교를 한다. 바오로는 회중들에게 구약의 역사를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 주셨음을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난 다음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제자들도 당신처럼 종의 모습으로 남을 섬기면 행복하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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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즘은 서비스 업종의 직원들이 고객을 섬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백화점, 상가, 식당, 주유소 등 어디를 가나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고객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섬기는 자세를 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합당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해관계가 없는 관계에서도 이렇게 섬기는 분위기가 있는가 물으면 씁쓸해집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섬김의 문화’라기보다는 ‘군림의 문화’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군림하고 싶은 심리를 상업적 전략으로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업적으로 지나치게 고객을 섬겨야 살 수 있는 문화라면, 그 이면에는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군림하고자 하는 ‘천박한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돈으로 사고, 허영심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양쪽 다 돈이 주는 위력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핵심 리더십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우리보다 못한 처지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돈과 힘을 섬기며, ‘비굴한 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약한 이들을 섬기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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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용을 좋아했습니다. 사모할 정도였습니다. 용 그림은 물론이고, 가구와 장식품에도 용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수저와 술잔도 용 그림이 없으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깥 정원에도 온통 용을 조각한 작품들을 진열해 놓았고, 연못까지도 용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집 안팎이 그야말로 용 모양으로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용이 소문을 듣고 가만히 내려왔습니다. 그러고는 정원에 서 있었습니다. 마침 용을 좋아하던 사람이 정원에 나왔다가 ‘그’를 봤습니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더니만, 용이 꼬리를 살짝 흔들자, 벌벌 떨면서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만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용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가 좋아했던 것은 ‘진짜 용’이 아니라 ‘용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용에 대한 ‘심미안’을 인정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용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를 그토록 갈망한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모른 척합니다.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느님을 믿는 것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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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표현의 교리적 해석이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한 분으로 계신다는 이론입니다. 완벽한 일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의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일치는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부부 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배어 나오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지니라는 당부입니다. 그래야 스승의 힘이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힘이 함께하면 아버지와 성령의 힘도 함께합니다. 놀라운 섭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의 배반까지 승화시킵니다. 유다는 떠나지만 스승은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훗날 제자들도 배신을 체험하지만 모두 받아들입니다. 고뇌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스승의 사랑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사랑하고 용서해야 주님의 제자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일치는 한 번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끝없는 용서가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가슴에 사랑을 담아야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힘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분수를 알면 행복하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데 있어서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습니다.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알면 안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