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35-40)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 순교 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더 박해를 받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더러운 영들을 쫓아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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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온 생애는 최후 만찬의 성체성사를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시다가, 마침내 최후 만찬에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십자가에 홀연히 당신을 제물로 바치십니다. 쉬실 겨를도 없이 바삐 다니시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고 위로를 해 주시다가, 결국 살아서는 다할 수 없는 사랑을 온전히 당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체 안에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반대로,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모습이 다시 우리 삶으로 다가와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를 당신의 공생활 장면으로 초대하시어 우리 내면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세상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 고개를 들어 들에 핀 꽃들, 공중의 새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병고에 시달릴 때, 중풍 병자들, 나병 환자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어야 할 존재의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당신 십자가를 보여 주시며, 그 너머의 당신 부활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십자가 너머에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에게 당신께서 우리의 빵이 되신 궁극적 이유를 전해 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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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담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분께 나아가면서 자괴감을 갖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앞세웁니다. 주님 앞에서 너무 송구스러워하는 것도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낮춰야겠지만, 애정은 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모 앞에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한다면 부모님이 더 상심하십니다. 언제라도 탄력 받는 관계로 복원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본질적으로 행복과 기쁨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육체는 외부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침입자를 퇴치합니다. ‘면역 체계’입니다. 선천적인 ‘방어 시스템’이지요. 그러기에 장기를 이식받으면 ‘면역 억제제’를 대거 투여한다고 합니다. 면역 체계의 무력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식된 장기를 이물질로 착각해 몸에 손상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면역 체계는 그만큼 본능적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동 장치’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면역 체계’입니다. 자꾸만 허무해지고, ‘이유 없는 불안’이 떠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믿고 맡기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빌 게이츠’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컴퓨터의 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오른 적이 있으며, 세계 갑부 순위에서도 늘 1위 아니면 2위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장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을 마치고 자퇴합니다. 변호사였던 부친은 그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해 줍니다. ‘그래, 네 생각대로 해 보렴.’ 이것이 부친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빌 게이츠’가 나타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떻든 나에게 오기만 하라.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가기만 하면 기쁨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우리는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일까요?
매일 기도를 빠지지 않고 바치는 것이 그분께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매일 묵주 기도를 5단씩만 바쳐도 성모님께서 붙잡고 인도해 주십니다. 신앙생활에도 꿈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깨닫는 소박한 꿈입니다.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면 어떤 형태로든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 네 생각대로 해 보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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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당신 삶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순명합니다. 자신의 뜻과 다르더라도 순명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자세는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노력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순명 서원을 하는 것도 그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순명하는 것은 쉽습니다. 즐겁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어렵습니다. 핑계와 불만을 쉽게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올바른 신앙인이 되려면 순명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데 필수 조건인 까닭입니다. 명령보다는 순명이 언제나 어려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맡겨진 사람은 잃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까지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맡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운명적으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부모와 자식, 부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순명의 정신을 어느 정도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염려할 것 없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어제는 종일 비가 왔습니다. 교구 교리교사의 날 행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가 와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행사는 끝이 났습니다. 청년밴드공연도 성황리에 할 수 있었고 주교님과 많은 신부님들이 함께한 미사는 기쁨에 넘쳤습니다. 신입교사들의 환영식과 장기근속 교사들에게 교황님 강복장과 해외성지순례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할 것은 다 하고 마무리 되었습니다. 걱정할 것이 없었는데 염려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빵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뜻'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슨 뜻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내 뜻이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 뜻이라고 많은 말을 했고 또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뜻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뜻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다.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즉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만이 안다. 나는 내 뜻에 의해 태어 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이 무엇인지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의 성소요, 찾은 그 뜻을 사는 것이 나의 성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펼쳐야할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경우가 많이 있다.
나의 뜻이라고 고집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뜻일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리는 일이요,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게 하는 일이다.
유다인들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표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 동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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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으로 오신 예수님 †
-두올묵상팀-
지금은 먹거리가 다양해지고 다이어트 때문에 밥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자란 60년대만 하더라도 '밥'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었고 생존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밥 먹었느냐?'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었을까? 지금도 북쪽에서는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정책목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 가운데서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결식아동들, 종교단체의 급식봉사 장소에 모여드는 행려병자들에게는 한끼의 밥이란 생존을 위한 절실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밥의 종류를 보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가 반영된 탓인지 순수한 쌀밥으로부터 콩, 팥, 보리, 수수 등과 섞어먹는 잡곡밥, 만드는 방법에 따라 비빔밥, 볶음밥 등 뿐 아니라 중국식이나 일식에서 발전된 잡탕밥, 짜장밥, 초밥, 회덮밥 등, 그리고 떡, 빵....등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유목인들에게는 빵(밀가루로 빚은 떡모양)이 주식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밥이 주식이다. 요즘이야 제과점이 많아서 빵이 흔하지만, 옛날에는 빵대신 떡이나 주먹밥이 일반적이다. 그런 떡이나 밥이 우리사회에서는 사랑의 표현으로 상징되기도 했다. 아침 인사가 '밤 먹능교?'에서 부턱 시작하여 하루종일 밥에 대한 인사가 지금도 일반적이다. 그리고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들은 먼길 떠나는 자식에게 반드시 '따뜻한 밥 한끼'를 지어 먹이시는 것과 길을 가다가 배 고플때 먹으라고 주먹밥을 몇개 싸주시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남북이산가족이 만난 현장에서 아흔살의 어머니는 일흔살의 북쪽 아들에게 손수 '밥 한끼' 못해 먹인 것을 아쉬워한다. '밥은 제대로 챙겨먹느냐?'라는 것은 떨어져있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안부를 묻는 말로서 사랑하는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이다.
반면, 떡은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옛날에 무인(武人)들은 서울 남산 밑에서 살고, 북촌에는 고관과 부자들이 살았는데 무인은 구차하고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탓으로, 이를 달래느라 술을 빚어 마셨고, 북촌의 고관이나 부자들은 삶이 넉넉하여 떡(빵)을 빚어 먹었다함.--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 관혼상제나 명절, 생일, 회갑등 잔치에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떡의 종류를 보더라도 경단, 송편, 꿀편, 삼색편, 인절미, 전병, 절편...등등. 맛과 멋을 한껏 낸 다양한 떡들은 부유한 자의 잔치용 음식이거나 기호식품이었다. (물론, 개떡이나 감자떡 같은 서민용 떡도 일부 있지만 그것은 모자라는 밥의 대용식임.)
내가 살던 고향마을에서는 가을이면 산소 앞에서 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시제(時祭)를 지내곤 하였는데, 요즘처럼 다양한 가공식품과 간식거리가 없었던 60년대 산골 아이들에게는 이 때야 말로 입을 즐겁게 할 절호의 찬스였다. 시제가 끝나기를 기다려 아이들이 길다랗게 줄을 늘어서서 콧물로 더러워진 손을 내밀면 어른들은 인절미를 하나씩 나눠주곤 했는데 달콤한 콩고물이 묻어나는 그때의 떡 맛이란!...그리고 군대시절 외출이나 휴가를 나오면 단밭빵을 먹는 기분이란.......그런 떡이나 빵이 영원히 준비되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하면 언제든지 배고프지 않을 밥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오늘복음의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라고 예수님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계신다. 영어성경에서는 'the bread of life'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개신교측에서는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영어의 bread와 생김새가 비슷한 '떡'으로 번역했다. 빵(bread)과 떡은 외양은 비슷하지만 문화적 컨텍스트가 다르다. 유목문화권에서 빵은 주식이지만 우리의 떡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먹는 주식이라고 볼 수 없고 기호식품에 가깝다. 번역을 '문화적 조옮김'이라고 본다면 '빵이나 떡'이라는 번역보다는 당연히 우리말의 '밥'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 나았을턴데...서양문화 중심으로 성경을 번역하다보니 그들의 주식인 빵으로 번역한가 봅니다. 예수님이 한국에서 살으셨으면 아마도 '밥'이라고 했을 것인데, 그지요...
예수님은 밥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밥집(베들레헴=빵집)'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말 '밥그릇(구유)'에 태어나시고 기꺼이 우리의 '먹거리'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입으로 들어와 먹히고 씹혀서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해주는 밥처럼, 어제도 먹고 오늘 아침도 먹었지만 또 먹지 않으면 배고파지는 밥처럼,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영혼의 먹거리 되시고자 스스로 자신을 내어 놓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밥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격제한을 두지 않고 누구든지 초청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통탄하신다. 또 미사에서 빵을 영하면서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 현주소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제 어제에 이어 오늘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빵잔치의 참의미를 설명하고 계신다. 먼저 기도로 준비하고, 푸짐한 은총의 선물도 준비를 하셨다. 그러나 꼭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3개 있다.
첫째, 생명의 밥(빵), 즉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이 준비하는 잔치에서는 술과 밥으로 배불리 먹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는 단순한 육의 빵만 먹여 보내시질 않는다. 생명인 진리의 빵을 먹여 보내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곧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영해야) 만이 인생의 영적 기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시카르 여인은 남편 다섯을 거느려 보았으나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지를 못했다.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서 말씀을 듣는 순간 물동이를 내동댕이치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생명의 빵, 즉 말씀을 매일 들으면서도 물동이를 내동댕이 친적이 있는지???
둘째, 구원의 감격하는 마음이다. 생명의 빵을 먹은 자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진한 감격을 느껴야 한다. 비록 내가 처한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성체를 영한 자들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받고 돌아가야 한다. 엠마오의 글레오파 일행이 진한 감동을 느껴서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달려가듯이 말입니다.
감격, 즉 진한 감동은 왜 나오는가? 주님은 말씀에 의하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요14,27)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 물질적이고, 말초적인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영적인 것까지, 그리고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과 희열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빵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새로 태어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얼굴에 함박 웃음과 미소를 안고 엠마오의 제자들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영적 풍요이다. 예수님의 밥, 생명의 밥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마신 자들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영적 풍요로움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이후로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영적인 갈증이 일어나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빵 잔치에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두번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하는 실증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이와같이 생명의 밥잔치에서 새로 태어나는 자들은 지속적으로 영적인 공급을 받아서 다시는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게 스스로 근신하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아멘).......◆
그대잊지않으리~김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