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3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I have life because of the Father,
so al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have life because of me.
(요한 6,52-59)

그리스도인들을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 이 체험으로 사울은 회심을 하였고 초대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현세라는 광야를 걷고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으며 광야를 걷듯,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날마다 생명의 빵을 먹으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광야의 여정을 걷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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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며칠째 계속 이어지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곧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을 순례하면 성체에 대한 기적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8세기 중엽 성 바실리오회 소속 수사 신부가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 실제로 살과 피로 변화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루어진 성체 기적은 빵과 포도주가 사람 심장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과학적 진술과 함께, 순례자들이 이를 볼 수 있도록 지금도 그 성당에 현시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기적을 교회 역사 안에서 보여 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미사 때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감히 성체를 모시지 못할 것입니다. 빵이 실제 사람 살로 바뀐다면 어쩌면 미사는 혐오스러운 사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 몰라도 성체가 주는 구원의 신비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상한 현상을 좇아서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이런 기적이 우리 신앙을 깊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눈으로 보아야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사실 신앙은 깨달아서 깊어지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았지만, 깨닫지를 못했기에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초대 교회는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철저한 일치’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성사를 염두에 두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러기에 성체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신다고 부담 없이 말합니다.
살을 부딪친다는 말은 ‘내밀한 관계’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피를 섞는다는 표현도 가족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성체를 모시면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몰라서 그렇지, 주님과 ‘살을 섞은’ 사이입니다. 지나친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조장하는 발언은 성경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살과 피를 준다는 표현으로 당신의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인간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점쟁이에게 가거나 이상한 곳에서 ‘엉뚱한 신앙 행위’를 할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장소는 언제나 감실 앞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체를 모셨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느낀 적이 없다면 오늘은 ‘실존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소박한 깨달음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맑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만납니다.
한 젊은이가 성지 순례 도중 유명한 수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젊은이 역시 평소 그분의 작품을 읽은 터라 내심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실에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 하나에 나무 걸상 서너 개, 책 몇 권이 전부였습니다.
젊은이는 깜짝 놀라 묻습니다. “수사님, 짐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수도자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나도 같은 질문을 하겠소. 당신의 짐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짐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순례 중이거든요.”
수도자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답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순례 중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매달릴수록 ‘천상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이 전부라고 여기면 그때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어떤 영적인 말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갇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다’는 말씀인데도 못 알아듣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만 되풀이합니다. ‘세상 시각’으로만 바라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누구라도 성체성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을 뜻합니다. 숨을 멈추면 죽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만큼 호흡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바랍니다. ‘공기 청정기’를 비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공기를 맑게 할지는 몰라도 비싸게 팔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운을 호흡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는 말씀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막?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막?세상과 부딪치며 살고 있는지요?
분노의 눈길은 아닌지요? 돈과 물질이라는 겉모습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 맑은 눈빛이 될 수 없습니다. 겉이 아니라 내면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을 호흡하는 눈빛이 됩니다. ‘나도 그러한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성체를 모셔 오고 있지만 아직도 주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바꾸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암시입니다. 천국을 바라기에 앞서 현실을 제대로 보는 건강한 시??갖도록 해야 합니다. 시??바르면 믿음은 자연스레 깊어집니다. 올바른 시??운명까지 바꿉니다.

영양을 보충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람들은 성당 사제관에 주방 근무자가 있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끼니를 잘 챙겨 먹는지 궁금해 합니다. 건강을 잘 챙겨야한다고 염려합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다 오히려 체중이 느는 것을 보면 잘 먹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음식을 먹고 탈이 난적도 없고 배고픈 적도 없으니 먹고 마시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매일 같이 진수성찬의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해도 소화를 잘 시켜 살과 피가 되지 않는다면 잘 먹는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에 맞는 음식으로 영양을 보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6,55-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음으로써 영양을 보충하듯 주님을 모심으로써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명으로 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에게 파견되셔서 아버지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제는 성체성사 안에서 아들을 먹어야 주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체를 모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고 살아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다 같이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시지만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점을 잘 설명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접목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하루에 영성체를 여러 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준비된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양식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하십시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러므로 영성체를 하기 전에 죄의 용서를 위한 고해성사를 통하여 영적인 준비를 하고 공심재로 육적인 준비를 한 다음 영성체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음식이든 잘 준비하여 먹고 소화를 제대로 시켜야 살과 피가 되듯이 예수님의 몸인 성체도 잘 준비해서 모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대로 모심으로써 그분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하나 되면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잘 모시기 바랍니다.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알도 마르코치) 사랑합니다.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전삼용신부-
하느님은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그 인간이 그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지 시험해 보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런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후손을 일으킬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이 늦은 나이에도 아들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이 이사악이고 이사악을 통해 많은 축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느님은 조금 자란 이사악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 아들이 멋도 모르고 지고 온 장작 위에 그를 묶어놓고 칼로 찌르려합니다.
이 믿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사악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면서 다시 이사악을 통해 세워질 하느님의 백성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축복을 그냥 주시지 않고 인간에게 축복을 받을만한지를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부스러기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모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며 귀한 은총이 부당한 사람에게 낭비되어져서는 안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는 것이 매우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상태로 성체를 영하면 하느님을 돼지우리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의 의미와 삼위일체를 연결시키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은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일까요?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당신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여 주시는 모든 것이 바로 사랑, 즉 ‘성령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요한 3, 34-35)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그 사랑은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 주실 때 아들은 죽음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세례를 통해 받으셨던 성령님을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며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이 주고 받음과 가난하게 됨과 부자가 됨은 삼위일체 안에서 쉼 없이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아들은 우리와 똑 같이 반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멜키세덱에게 바친 것처럼 벌어들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바칩니다. 사제는 그 제물을 마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아버지께 바칩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그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곧 생명나무, 즉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것보다 큰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만큼 작은 은총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봉헌을 통해 증거됩니다.
실제로 봉헌된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매 순간 그분의 뜻을 찾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겉으로만 봉헌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그것을 다시 되돌려주시듯이 우리도 받은 만큼 돌려 드려야합니다. 그 드림을 통해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 반명순 수녀-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날 만도 합니다. 누군가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과 음료가 되며,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니 가당치도 않거니와 굳이 이해하려고 들자면 이보다 더 어려운 말씀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분의 ‘살과 피’?가 무엇이길래 영원한 생명을 주고, 그 살과 피를 먹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지요??
‘살과 피’?를 말한다면 그건 누군가의 생명이고, 목숨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지 않고 살과 피를 줄 수 없으며, 목숨을 아낀다면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살과 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살과 피’는 단순히 한 덩이의 ‘살과 피’?가 아니라 그분 자체를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표징이며 실재입니다. 그 ‘살과 피’?는 속량된 사랑이며, 조건 없이 내주는 무상의 선물이고, 낯을 가리지 않고 오는 참된 평화인 동시에 벅찬 희망입니다. ]
아낌없는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베풀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되며, 친교와 나눔을 가져오는 내적 힘이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가 되어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으로 육화되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지표가 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나한테서 이웃에게 전해지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그리스도의 친교와 나눔을 이루지 못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내가 먹고 있는 빵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지’, 아니면 ‘우리 조상들한테서 물려받은 빵’?(58절 참조)인지?….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 서동원 신부-
어제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살’을 육체적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당신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에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요한 6,54-55) 유다인들에게 ‘살과 피’는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무한히 크신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합니다. 미사 중에 거행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 그것을 성부께 바치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의 희생을 새롭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양식이 되어 우리를 신앙 안에 굳세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도록 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체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 큰 희망에 대하여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분명한 징표는 없다. 실로 이 신비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1405항)
우리는 매일 미사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 모십니다. 과연 우리는 미사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 모시는 가운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얼마나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습관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유 광수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영성생활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의 모든 삶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도록 노력하는 생활이다. 즉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나의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을 낱낱이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생활이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단 한발작도 나아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단 한 순간도 숨을 계속해서 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다.
하느님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이끌어주셨고 거룩한 사람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는 존재이지 내가 앞장서서 하느님을 이끌어 가는 창조주가 아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나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신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깨닫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라면 이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어떤 자세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야 하는가?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영성 생활은 무엇인가?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셨다.
성바오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 (갈라 5,25)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 14-15. 27-28)
그럼 어떻게 따라 가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단계적으로 제시해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들을 찾아 보면 "나에게 오는 사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 믿는 사람...먹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아버지께 가는 자세요,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세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믿는 자세요, 네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먹는 자세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가기 위한 첫 번째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아 나서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나서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다.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우 소극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6)이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께 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가? 아버지께 가야 한다는 주리고 목마름이 있는가?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이다. 이것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기 때문이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음식이 반갑지 않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에게 물의 필요성을 못 느끼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도 그 고마움을 느낄 수 없으리라.
맛을 못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아버지의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도다." 라는 그 말을 이해하겠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 배우지 않는데 어떻게 알고 아버지께 나아가겠는가? 배움이 없이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세 번째는 배운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배움은 지식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아버지께 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서를 공부한 학자들라고 해서 또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못하다. 배움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어떤 배움이든 우리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잘 따라 가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해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인 아버지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없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영양가를 공급받는다. 먹어야 힘이 나고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빵인 말씀을 먹는 사람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방법이요, 단계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른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다. 애매한 일도 아니다. 그 길은 분명하다.
영성생활은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즉 내가 주도하는 생활이 아니라 나를 이 끌어 주시는 분에게 나를 의탁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피상적인 자세는 아니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수동자세이어야 한다. 좋은 자세가 마리아의 자세이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씀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수동적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지도록 마리아는 혼신의 삶을 살으셨다. 한번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셨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말씀 하신 대로 이루워 지도록 그 말씀에 충실하셨다. 이것이 영성생활을 하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자세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실천하는 삶이다.
나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는데, 그리고 그분의 소리를 듣는데, 그분의 손길을 자는데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한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