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5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The sheep follow him,because they recognize his voice.
(요한 10,1-10)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시라고 선포한다. 그는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에게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보여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영혼의 목자이며 보호자가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로 인도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셨던 팔레스티나는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입니다. 해안 지역을 빼고는 대부분 지역의 기후가 건조하고 메마른 나라입니다. 당시 내륙 지방의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주변을 빼고는 올리브를 가꾸고 양 떼를 기르며 목축업을 할 수 있는 산록 지대였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건기가 되면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멀리 풀밭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임시 양 우리에 들어가 다른 양 떼들과 섞여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밤이면 종종 도둑들이 양 우리를 넘고 들어와 양들을 해치고 훔쳐서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각자 자기의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다시 풀밭으로 데려갑니다. 목자들이 양 떼를 그냥 몰고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양들 하나하나에 목자들이 지어 준 고유한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 소리를 내며 주인을 따라 나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목자와 양들의 풍경을 보시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양들처럼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다.”(마르 6,34)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몸소 우리 인생길을 이끄시는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른 아침 목자를 따라 나서는 양들처럼, 우리는 오늘도 신나게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그분께서 오늘도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
오늘 복음의 목자는 착한 분입니다. 당당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한 목자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부딪쳐 해결합니다. 잔머리를 쓰거나 계책을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요. 평범한 말이지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만큼 착하고 당당한 목자가 드문 까닭입니다. 성직자만이 목자는 아닙니다. 부모와 선생님과 모든 장상(長上)이 다 목자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드뭅니다. 정확한 목자는 많아도 정에 끌리는 목자는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고 하셨습니다. 꾸짖는 목소리는 아닐 겁니다. 따지는 목소리도 아닐 겁니다. 애정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였을 겁니다.
믿음 역시 위에서 내려옵니다. 물이 흘러내리듯 아랫사람에게 전달됩니다. 목자가 양들을 믿으면 양들은 즐겁게 따라갑니다. 그렇지만 목자가 의심하면 양들은 불안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인 역시 누구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맡겨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적으로 맺어진 자신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착하고 당당한 관계인지요? 따뜻하고 믿음을 나누는 관계인지요? 아니라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서로 통하고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 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한자성어 중에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 란 뜻으로 ‘말도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에로 전하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말없이 약간 비틀어보였는데 가섭이란 제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더욱 주님과도 소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10,27-28)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커킹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 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소의 못자리라고 하였던 우리 본당의 잃었던 권위가 회복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손녀를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을 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혼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에로 부르심 받는 것이 은총입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는 몇 명이나 될까?
교황청 교회통계 연감 발표
2009년 말 현재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수는 11억 8066만 5000명으로 지구촌 인구(67억 7759만 명)의 17.4%로 나타났다.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브라질(1억 6390만 명)이다. 503만 5000명의 신자가 있는 한국은 세계 227개국 가운데 45번째로 그 수가 많다.
대륙별로는 아메리카가 63.1%로 신자 비율이 가장 높다. 유럽(40.0%), 오세아니아(25.9%), 아프리카(18.1%) 대륙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전체 인구 41억 1558만 명 가운데 1억 2586만 명(3.1%)으로 신자 비율이 가장 낮다.
나라별로는 브라질에 이어 멕시코(1억 755만 1000명), 필리핀(7537만 명), 미국(6960만 9000명) 순으로 신자 수가 많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인도(1857만 3000명), 인도네시아(708만 2000명), 베트남(628만명)에 이어 한국(503만 5000명)이 5번째로 많다.
교구(성직 자치구ㆍ자치수도원구ㆍ자치선교구 포함) 수는 총 2956개(라틴예법 2733개, 동방예법 223개)로 집계됐다. 주교 수는 5065명, 사제 수는 41만 593명이다.
한국 천주교회 신자수는 5,120,092명으로 총인구50,643,781의 10,1%로 나타났다. 2011년5월 현재 주교34명(추기경1, 대주교 5, 주교 28)이며 현직은 23명(추기경1, 대주교 2, 주교 20)이다. 성직자는 4,374명이다.
청주교구 신자수는 151,458명으로 총인구1,378,968명의 11%이다. 성직자 현황을 보면 주교 1명 신부168명, 부제5명이다. 교구에서 활동하는 수도단체는 28개이며 수사81명, 수녀506명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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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에게는 OO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용식 신부-
오늘 성소주일 복음 말씀은 예수님과 사람을 목자와 양에 비유합니다. 목자는 양을 먹여 주고 늑대에게서 보호해 주고, 밤에는 우리에 넣어 밤새도록 지켜줍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양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존재입니다.
양은 무기가 없는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침입하는 적에 대항하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라도 있습니다. 호랑이와 독수리는 강한 무기를 갖고 있고, 토끼나 다람쥐는 숨거나 도망치는 재주가 있습니다. 느림보 거북이도 딱딱한 껍질의 보호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적에게 대항할만한 무기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도,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도 없습니다. 오히려 털이 꼬불꼬불해서 나무에 걸리면 잡히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양은 보호자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온 산천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그 양을 구하지 않으면 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 없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양이고 예수님은 목자입니다. 양에게 무기가 없듯이 신앙과 구원에 있어서 신자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목자인 예수님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늑대에게 물려갈지, 언제 낭떠러지에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약합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당신을 대신해 양들을 돌볼 목자를 뽑으셨습니다. 그 목자들이 바로 오늘의 사제들입니다. 예수님 시대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셨지만 지금 시대 목자는 예수님이 뽑으신 사제들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지금 시대 신자들에겐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소주일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사제들 없이는 교회를 원치 않으셨다. 사제들이 없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분의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는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줘야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줌으로써 신자를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했기에 사제를 '아버지'(father, 神父)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없이 자녀가 태어날 수도, 양육될 수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제 없이 신자가 되기도 어렵고, 신자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가 용서됐어도 살아가면서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용서받아야 되는데 이때도 사제가 있어야 고해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제가 있어야 미사를 드릴 수 있고, 미사 때 축성된 예수님 몸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밖에 하느님 은총을 받는 모든 성사생활은 오로지 사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제가 없으면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제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느님 은총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제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사제 없이 하느님 자녀가 돼 구원받기란 아주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처럼 그 대리자인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있기에 신앙생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듯이 신자들은 영적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사제들에게 영적으로 효도해야합니다.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부모의 공로가 없어지지 않듯이,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영적 아버지인 사제의 공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신자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제를 아버지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도록 힘쓰십시오. 사제의 인간적 약점에서 오는 작은 실수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사랑으로 덮어주고 감싸주십시오. 또한 말과 행동으로 사제의 사목활동에 적극 협조하십시오. 사제를 당신 대리자로 뽑으신 주님께서 틀림없이 은총으로 보상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소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최인각신부-
거룩한 부르심
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양들로 여기시어, 당신의 푸른 목장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원의 푸른 목장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풀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행복이 밀려옵니다.
오늘은 주님의 목장에서 행복하게 노닐며 기쁘게 풀을 뜯는 양들에게 목자의 사랑과 보살핌을 충분히 받도록 봉사할 젊은이를 초대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제가 며칠 전 신학생들에게 했던 훈화 내용 일부(더 큰 열정과 야망을 갖고 사제직에 임할 마음을 갖자)를 여러분에게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 5월 아름다운 성모님의 달, 신록의 계절을 맞으며 여러분과 함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며칠 전 피겨 여왕 김연아(스텔라)의 경기를 보며, 김연아 선수가 피겨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의 열정과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교황님은 많은 성무활동을 하시며 인류, 특히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이 있던 날, 그분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카롤 보이티아 신학생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주님, 이제부터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기도가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돕니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무시하며, 자유를 제한하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사제직의 삶을 결정하고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바친 한 신학생의 기도였지만, 이미 교황으로 준비된 이의 열정적 마음이며, 기도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학생들에게 그런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김연아 선수와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이 열정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성인 신학생’, ‘성인 신부’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 신학생들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 의식은 ‘거룩함’이 아닌가 합니다. 적당한 타협이 아닌, 과감한 투신이 포함된 거룩함의 정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의 기쁨,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온 존재를 십자가 위에서 살라 바치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지극히 크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와 자비를 베풀며, 구원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기 위해 그 뜻을 받들고 시작한 우리 사제직의 성소! 정말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용맹정진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다짐했던 거룩한 용맹정진의 마음을 기억하며, 주어진 삶을 여한 없이 살아봅시다.
막 피어나는 푸른 나뭇잎보다 더 푸르게, 진한 라일락 꽃향기보다 더욱 진하게,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철쭉과 장미보다 더욱 아름답게,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나비보다 더 자유롭게, 우리가 생각했던 거룩함보다 더욱 거룩하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밝게 거룩한 빛을 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의 승리가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도 감동하는 천주의 사제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신학생들이 하느님 당신을 향한 열정을 뜨겁게 갖도록 도와주시고, 온 세계를 끌어안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큰 힘을 주시며, 북극과 남극의 추위를 녹일만한 뜨거운 가슴을 주소서. 주님,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마더 데레사의 섬세함도 주시며, 천 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통찰력을 내려주소서. 어떠한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용감히 일어나 당신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어둠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처럼 빛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신학생들이 잘못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훈화와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더욱 훌륭한 신학생으로서 사제직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성소자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그들이 훗날에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 않은 길”
-고찬근신부-
‘성소(聖召)’라는 것은 말 그대로 聖스러운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여러 가지 부르심 중에 어떤 것이 성소일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분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우리를 사랑에로 부르는 것을 바로 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가 있느냐?’ 하고 묻는 것은, ‘지금 너는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느냐?’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성소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들릴 수 있으며, 그것을 따르는 길 또한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주교님은 어렸을때 집안이 몹시 가난했는데, 집에 오신 신부님께 어머니가 계란찜을 해 드리는 것을 보고 계란찜이 먹고 싶어 신학교에 가셨답니다. 후에 주교님까지 되셨지만… 또한 나환자의 벗이 되신 신부님도 계시고, 노동자가 되신 신부님, 병을 고치는 의사 신부님, 음악을 하는 신부님도 계십니다. 수도자가 되는 것도 성소이고, 성가정을 만드는 가장이 되는 것도, 성모님 닮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도 성소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삶이 바로 성소의 삶입니다. 성소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 도구를 필요로 하십니다. 어떤 모습의 삶이든 ‘사랑에로의 부르심’이라면 그것이 성소입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사랑하기 위한 ‘자기 자리’를 찾아내고,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가 되면 그곳이 바로 ‘성소의 자리’라고 믿어도 됩니다.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그곳은 성소의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성소라는 것은 계속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기나긴 여정입니다. 우리 삶의 성소는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사제가 죽으면 수의 대신 첫 제의를 입히는 것입니다. 죽을 때 비로소 성소가 완성되어 사제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우리들의 사랑도 지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은 서로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때로는 고독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성소를 받고 나름대로 성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은 서로를 위해 늘 기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예수님의 향기가 되어야 하고, 사제에게 신자들은 목숨 바치고 싶은 연인이어야 합니다.
사제에겐 신자들의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착한 사제가 되도록, 건강하고, 늘 깨어 기도하고, 공부하는 사제 되도록, 또한 사제 공동체가 하나로 화합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또한 오늘, 요즈음 차츰 줄어드는 사제, 수도자 성소를 걱정하며, 부모들이 훌륭한 자녀를 바치도록, 하느님께 나아갈 자녀를 붙잡지 않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