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엠마우스(루가 24,13-35)

2011. 5. 7. 오전 10:00:13

글자
 2011년 5월 8일 일요일  부활 제3주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았다
(루가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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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음을 설교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었음을 가르친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하느님을 믿게 된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라고 당부한다(제2독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에서는 동행하시던 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다가, 빵을 떼어 주시고 사라지시자 그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는다. 주님 부활은 마음이 열려야 깨달을 수 있는 하느님 구원의 선물이다(복음).
 
오늘의묵상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몸소 나를 나병 환자들에게 데려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도무지 계실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처참한 고통의 자리에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깨닫지요. 그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 과학이나 철학적 사색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만난 낯선 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셨듯이, 나병 환자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 부활 체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숱한 만남과 사건 속에서 주님 부활 사건을 끊임없이 체험합니다. 특별히 가장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인생에 닥쳐 온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의 바닥, 예수님 십자가 안에 이미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스승의 죽음은 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을 달래려 그들은 시골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전혀 모릅니다. 왜 몰라보았을까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선입관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미 죽었다는 선입관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오셨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다. 그만큼 선입관은 무섭습니다. ‘스승은 돌아가셨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들은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저 덤덤하게 느껴진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를는지요? 부활의 기쁨을 위해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입관이 빠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부활 시기가 있는 것이지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은 뜨거움을 체험하였습니다. 기쁨이라는 뜨거움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은총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부활 시기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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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죽음을 보았기에 마음이 심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체념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마음을 닫았던것입니다. 그들도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깨달음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스승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체념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마음을 닫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삶을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바뀐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사랑의 질책이십니다. 실제로 마음을 정하는 데 답답하고 느립니다. 우리 안에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있는 탓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고집을 부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뜨겁게 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이 곧 부활의 은총입니다.

 

 

희망을 잃었을 때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인줄을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제자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 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 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요즈음 제가 전화를 많이 받게 되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저께는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여러분에게 알려드릴까요?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하잖아요!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주님의 잉태를 받아들이셔서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며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에 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실 뿐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

-허영엽신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두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에 그들의 동료들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생각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에 관한 성서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서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참으로 뜨거운 감동을 느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성서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먼 길을 동행하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염려하여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묵어 가자고 초대했습니다. 우연히 만난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그네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루가 22,19-20; 1고린 11,23-25 참조). 나그네는 일용할 양식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따뜻이 대접한 평범한 나그네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며,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나에게 접근해 오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나는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야”(1베드 1,17) 합니다. 하느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소홀히 대하지 않고, 즐겨 예수님에 관해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마태 10,42)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묵히 실천할 따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주님을 찾으려 했을 때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특정한 장소에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일상 중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우연히 스치는 사람에게서 주님을 만나 뜨거운 감동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Track.07 - 엠마우스 (신상옥과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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