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5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신 부활 사건을 목소리 높여 담대하게 전한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입으로 예고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부활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와 원로들에게 매수된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힘없고 가난한 여인들에게서 선포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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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옛날 우리 나라는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유교 윤리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할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가슴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해결되지 않는 억눌린 심정을 우리는 ‘한’(恨) 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 사회의 여성도 이런 한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강한 남성 중심의 율법주의에 빠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구약 시대보다 여성의 지위는 더욱 열악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여성은 어리석고 우상 숭배에 잘 빠지는 열등한 존재로서 때로는 물건이나 종처럼 팔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사회의 여성은 우리 나라의 옛 여성보다 훨씬 더한 상처와 한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에 대한 아무런 편견도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결혼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여성을 남성의 욕망에 침해당할 수 없는 동등한 인격체로 회복시키셨습니다(마르 10,6-12 참조). 토라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전혀 없는 사회 환경을 깨고 마리아를 발치에 앉혀서 가르치셨고(루카 10,39 참조), 부도덕하다고 낙인찍힌 여성조차도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루카 7,38참조).
오늘 복음에서 유다 사회의 여성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상처에서 해방되었던 여성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자가 됩니다. 불어에서 ‘상처’와 ‘은총’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여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상처를 은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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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소식을 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여인들과 경비병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빈 무덤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기쁨의 체험이었지만, 경비병들에게는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음자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지만, 경비병들에게는 의무감뿐이었습니다. 한쪽은 사랑이었지만, 한쪽은 ‘그저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를 만나고도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보통 인간이 어떻게 ‘천사’를 목격할 수 있을는지요? 그런 행운을 잡았지만 경비병들은 놀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경비병들의 말을 듣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더 어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경비병들을 이용해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귀찮아서 그랬을 겁니다. 그냥 덮어 버리면 될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무사안일한 태도입니다. 축복이어야 할 주님의 부활이 그들에게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활을 대하는 자세는 여러 형태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건도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복음의 여인들처럼 ‘확실한 마음’이 되어야 기쁨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정쩡한 마음’이면 결과 역시 언제나 어정쩡해집니다. 주님의 부활을 깨달았다면 신앙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라고 예수 부활 대축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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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 짧은 두레박으로는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 없습니다. 억지를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다칠 수 있습니다. 줄이 짧으면 당연히 줄을 늘이거나 다른 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게으름 때문입니다.
복음의 경비병들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천사들이 무덤의 돌을 치우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부에 보고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조작을 시도합니다.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합니다. 짧은 줄로 우물의 물을 길으려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하여 비겁한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업적이 이렇듯 엉뚱한 사건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이론이 아닙니다. 지나가 버린 ‘사건’도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이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셔야 가까이 갈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력 없이 은총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짧은 줄로 ‘우물의 물’을 길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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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빈 무덤의 원인을 제자들의 절도로 돌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건이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연유로 비겁한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린 사건에 다시 연루되는 것이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사건 역시 제자들의 절도로 짐작하였습니다. 물증이 없었기에 경비병을 매수해 증인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사건을 이렇듯 당시 지도자들은 각색하였습니다.
부활은 속임수가 아닙니다. 논쟁의 대상도 아닙니다. 학문과 이론의 대상은 더욱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과 깨달음의 차원입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새로움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짧은 지식으로 부활의 은총을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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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사람을 움직인다
*@반영억신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 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증거 되었습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엠 마 우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