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7일 일요일[(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 주 간
예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한다. 성주간 동안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 따라서 교회 전례에서 성주간은 전례의 정점을 이루며, 가장 거룩한 시기이다.
성주간을 지내는 관습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3세기 무렵에는 예수 부활 대축일 전 금요일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 아침까지 3일 동안을 성주간으로 지냈는데 지금과 같이 일주일의 성주간을 지내게 된 것은 5-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중세 때는 성주간을 ‘수난 주간’ 또는 ‘파스카 주간’이라고도 하였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시작되는데,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이후 성목요일 전까지는 특별한 예식은 없으나 예수님의 죽음 예고와 제자들의 배반,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을 기념하는 복음을 읽는다. 성목요일이 되면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사순 시기가 끝난다. 이날 오전에 각 교구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이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하며, 사제들의 서약 갱신과 성유 축성식을 거행한다.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와 성품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로써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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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개선을 기념하면서 한편으로는 다가올 그분의 수난을 선포한다. 따라서 교회 전례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통하여 예수님을 환호하고, 미사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전하는 ‘수난 복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오늘 전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며 주님을 우리의 진정한 임금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아울러 참된 임금님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는 은혜를 구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1. 이날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을 기념한다. 그러므로 모든 미사 때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음과 같이 기념한다. 중심 미사 전에는 행렬이나 성대한 입당식으로, 그 밖의 다른 미사 전에는 간단한 입당식으로 이 사실을 기념한다. 행렬은 한 번만 할 수 있으나 성대한 입당식은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는 미사 전에 반복할 수 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입성 기념 행렬
교우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입성을 단순히 민속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스카의 주년 축제를 시작하는 전례 행위이다. 이 행렬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시지만 아버지의 영광 안에 다시 오실 것을 확인하게 한다. 여러 단계로 거행되는 오늘의 전례에서 우리는 파스카 여정의 모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1양식: 행렬
2. 적당한 시간에 교우들은 축복할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입당할 성당 밖의 작은 경당이나 적합한 장소에 모인다.
3. 사제는 미사 때처럼 붉은색 제의를 입고 봉사자들과 함께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 제의 대신에 카파를 입어도 좋으나 행렬이 끝나면 벗어야 한다.
4. 그동안 아래의 노래를 하거나 다른 알맞은 성가를 부른다.
따름 노래 마태 21,9 참조
◎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이스라엘 임금님, 높은 곳에 호산나!
5. 사제는 보통 때와 같이 교우들에게 인사하고, 예식에 능동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참여하라고 아래와 같은 말이나 비슷한 말로 권고한다.
+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사순 시기 처음부터 속죄 행위와 사랑의 실천으로 마음을 준비하였고, 오늘은 교회와 함께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준비하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주님의 입성을 기념하고, 은총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며, 주님의 부활과 그 생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6. 권고가 끝난 다음 사제는 손을 모으고 아래의 기도를 바친다.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나뭇가지에 강복하시고 ? 거룩하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고 환호하는 저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사제는 말없이 나뭇가지에 성수를 뿌린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복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평화의 임금님이신 예수님께서 행렬을 지어 도성으로 들어가는 이 장엄한 예식에,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권세가들이 타는 짐승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한다. ‘호산나’는 ‘구원을 베푸소서.’라는 뜻을 갖는다. 구원의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을 통해 열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7. 복음은 부제가, 부제가 없을 때는 사제가 보통 때와 같이 봉독한다.
복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1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 줄 것이다.”
4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5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6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7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8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10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8. 복음을 봉독한 다음 강론을 짧게 할 수 있다. 행렬을 하기 전에 사제나 적합한 사람이 아래와 같은 말로 권고할 수 있다.
+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을 본받아 평화의 행렬을 합시다.
9. 이어서 미사를 거행할 성당으로 행렬을 시작한다. 향을 사용하면 선두에 향을 피워 들고, 그 뒤에 아름답게 장식한 십자가가 서고 그 양옆에 촛불을 켜 든 봉사자가 선다. 그다음에 사제가 봉사자들과 함께 서고, 그 뒤에 나뭇가지를 든 교우들이 따른다. 행렬하면서 성가대와 교우들은 아래의 노래나 다른 알맞은 성가를 부른다.
따름 노래 1 시편 24(23)
◎ 히브리 아이들이 올리브 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환호 소리. “높은 곳에 호산나!”
○ 주님 것이로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
○ 주님께서 물 위에 그것을 세우시고, 강 위에 그것을 굳히셨도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주님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
○ 그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로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 ◎
○ 이들이 주님을 찾는 이들의 세대, 주님 얼굴을 찾는 이들의 세대 야곱이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
○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
○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로다. ◎
따름 노래 2 시편 47(46)
◎ 히브리 아이들이 옷을 길에 깔고 외치는 소리.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로다. ◎
○ 주님께서는 민족들을 우리 밑에, 겨레들을 우리 발아래 굴복시키셨도다. ◎
○ 주님께서는 우리 상속의 땅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의 자랑을 우리에게 골라 주셨도다. ◎
○ 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
○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가를 불러라. ◎
○ 하느님께서 민족들을 다스리시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어좌에 앉으시도다. ◎
○ 뭇 민족의 귀족들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백성이 되어 모여 오도다. ◎
○ 세상의 방패들이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어라. ◎
그리스도 임금께 드리는 성시
◎ 영광, 찬미, 영예, 모두 임의 것, 그리스도 임금님 구세주! 아이들의 기쁜 노래 또한 호산나로다.
<성시는 선창자가 하고 교우들은 후렴을 반복한다.>
○ 이스라엘 임금이요, 다윗 임금의 후예시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복되신 임금님, 오소서. ◎
○ 하늘 천사들이 주님을 함께 찬미하고, 인간과 조물이 주님을 같이 기리도다. ◎
○ 히브리 백성이 팔마 들고 마중 가니, 기도와 노래 불러 함께 기리나이다. ◎
○ 수난하실 주님께 찬미 예물 드리오며, 하늘 나라 임금께 찬송드리나이다. ◎
○ 그들의 찬미같이 저희 정성 받으소서. 모든 선의 근원, 만선미호의 임금님. ◎
10.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에 아래의 노래를 하거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다른 알맞은 성가를 부른다.
◎ 주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히브리 아이들이 생명의 부활을 미리 외쳤도다. *손에 팔마 들고 부르는 노랫소리, “높은 곳에 호산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 들은 백성이 주 예수님을 마중 나가며, *손에 팔마 들고 부르는 노랫소리, “높은 곳에 호산나!”
11. 사제가 제단에 이르면 제대에 절하고 분향할 수 있다. 그리고 주례석으로 가서 (카파를 벗고 제의를 갈아입는다.) 시작 예식을 생략하고 주일 미사의 본기도를 바친 다음 미사를 계속한다.
제2양식: 성대한 입당식
12. 성당 밖에서 행렬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성당 안에서 중심 미사 전에 성대한 입당식으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13. 교우들이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성당 입구나 성당 안에 모인다. 그리고 사제는 봉사자들과 몇몇 교우들과 함께 제단 바깥 적당한 자리로ㅡ대부분의 교우들이 예절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로ㅡ간다.
14. 사제가 예식을 거행할 자리로 가는 동안 “호산나!…….”를 노래한다. 그 자리에서 나뭇가지를 축복하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을 봉독한다(5-7항). 복음 봉독이 끝나면 사제는 봉사자들과 대표 교우들과 성당 중앙을 통해서 주례석으로 성대하게 행렬한다. 그동안 “주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10항)라는 노래를 부른다.
15. 사제가 제단에 이르면 제대에 절하고 주례석으로 가서 시작 예식을 생략하고 주일 미사의 본기도를 바친 다음 미사를 계속한다.
제3양식: 간단한 입당식
16. 성대한 입당식이 없는 미사에서는 간략하게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17. 사제가 제단으로 나올 때에 아래의 입당송과 시편을 노래한다. 또는 같은 내용의 다른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사제는 제단에 이르면 제대에 절하고 주례석으로 가서 교우들에게 인사한 다음 미사를 계속한다. 교우들이 없는 미사와 입당송을 노래할 수 없는 미사에서는 사제가 제단에 와서 제대에 절한 다음 곧바로 입당송을 읽고 미사를 계속한다.
입당송 요한 12,1.12-13; 시편 24(23),9-10 참조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호산나! 큰 자비를 베푸시러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로다. *“높은 곳에 호산나! 큰 자비를 베푸시러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18. 행렬이나 성대한 입당식을 할 수 없는 곳에서는 토요일 저녁때나 주일 적당한 시간에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과 주님의 수난에 관한 말씀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 좋다.
미 사
19. 행렬이나 성대한 입당식이 끝나면 사제는 본기도를 바친다.
[복음] 촛불도, 향도, 인사도, 책에 하던 십자 표시도 없이 읽는다. 부제가 읽든지 부제가 없으면 사제가 읽는다. 평신도도 읽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되도록 사제가 읽는 것이 좋다. 부제가 읽을 때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축복을 청한다.
[복음묵상]
긴 수난 복음에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눈길이 갑니다. 베드로에 대한 묵상을 졸시로 대신합니다.
베드로, 무엇이 당신을 이끄는가. / 힘없이 끌려 가는 은전 서른 닢의 스승을 / 무얼 더 바랄 것이 있어 / 그를 따라가고 있는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 거친 풍랑 속에 빠져드는 몸뚱아리 / 손을 내밀어 건져 주던 그때 그 스승은 / 이제 아니다. / 욕설과 조롱 속에 이지러진 몰골의 / 한낱 떠돌이일 뿐.
젖어 드는 어둠, 모닥불로는 견딜 수 없다. / 가슴속 요동치는 절망과 비애의 폭풍이 / 어둠 속을 배회하더니 / 결국 배신자의 얼굴은 작은 불빛에도 / 그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왜 울고 있는가, 베드로. / 먼 닭 울음소리가 토해 낸 스승의 기억들 / 무엇이 이토록 당신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가. / 눈물은 어둠에 스며 스며 / 요르단 강으로 흐르고 있다.
저 강물 보이는가. / 은총의 물결 소리 들리는가. / 당신의 후예들이 흘린 참회의 강가에 / 뿌옇게 새벽이 묻어 오고 있다.
베드로,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쓰더라도 뱉지 않고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감탄고토’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9)하고 외쳤습니다.
옷을 길바닥에 갈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2.23)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27,29)를 외쳤습니다.
환영받던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며 중풍병자가 일어섰고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십자가 앞에 서니까 마음들이 완전히 돌변하였습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 배신자! 누구? 은전 서른 양에 주님을 팔에 팔아먹은 유다, 십자가 죽음 앞에 도망간 제자들...우리는?)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가지 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 빼기에 익숙합니다. 그러고나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하며 속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부모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2745)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 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순간 훔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네.”라고 쓰여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간청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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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하느님 사랑의 표시, 자유의지>
유다의 배신을 묵상하며 지난 세월 예수님께 대한 저의 배신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배신했던 그 누군가를 떠올려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유한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 인간 사이에서 서로 배신을 주고받는가 봅니다.
유다의 죄와 배신, 그리고 우리들의 죄와 배신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선만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만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안 그래도 나약하고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가?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아갈 방향이나 앞으로 전개될 삶의 유형을 미리 딱 규정하여 놓으셨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엮어가며 독자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존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배려하신다는 표시입니다. 때로 우리가 심각한 죄 중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우리가 사랑 자체이신 그분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철저하게도 배반한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분은 그냥 그대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죄를 지었냐고, 왜 그 따위로 살아 가냐고, 언제 인간될 거냐고, 단 한 번도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계십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십니다. 그저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속마음을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유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장을 왜 눈치 채지 못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배신의 조짐이 포착되자마자 즉시 유다의 그런 상황에 대해 다른 제자들에게 떠벌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유다를 사무실에 불러 앉혀놓고 인생 그렇게 살면 되냐고 혼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먹으라고 닦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함구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구박받지 못하게 배려하십니다. 주도권을 유다에게 주십니다. 그가 결정할 수 있도록, 그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그가 자발적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참아주십니다.
참으로 무한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바보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납득 안가는 어처구니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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