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42)

2011. 4. 13. 오전 7:13:43

글자

 

 

2011년 4 13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42)

 

 "If you remain in my word,
you will truly be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말씀의 초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다니엘의 세 동료에게 자신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들이 거부하자 불가마 속으로 던져 넣는다. 주님의 천사가 불가마에 내려와 그들을 불에 타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고, 그들은 불 속에서도 주님을 찬미한다(1독서). 진리가 무엇인지는 진리이신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깨달을 수 있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온갖 근심과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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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진리가 무엇이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하며 던진 질문입니다. 정말 진리는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참된 이치또는진실된 도리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진리가 이렇게 몇 마디 말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 인생에 대한 질문도 없어질 것입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하느님을 아는 것나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깊이 알면 나를 알게 되고, 나를 깊이 깨닫게 되면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도 알게 됩니다. 진리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금 인형이 있었습니다. 소금 인형은 자기를 있게 한 바다를 늘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소금 인형이 바다가 무엇인지 알려면 바닷물에 잠겨 그 안으로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싶으면 주님과 이루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이신 그분 안에 머물러야만 참으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모든 두려움과 번민을 벗어나 내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살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출발은 바로 주님 말씀에 머물며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답도, 진리도,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을 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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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자유는 무엇이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생각입니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랑이 곧 자유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동문서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워 종노릇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핀트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인내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자유로움입니다.
누구라도 나만 잘났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도 때로는 아이가 옳을 수 있습니다. 큰 그릇의 사람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만, 옹졸한 사람은 허세를 부립니다. 복음의 유다인들 역시 만용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삶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사랑하며 사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면 자유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용서하면 미움이 사그라지고, 절제하면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선행을 베풀면 삶의 허무마저 기쁨으로 바뀝니다. 진정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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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워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분과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선입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의심하는 선입관입니다.
그분의 기적을 보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었건만 편견을 깨지 못합니다.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닫은 마음에는 기적도 지나가는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그들은 이 말만 되풀이합니다. 작은 것에 집착해 큰 것을 외면하는 모습입니다. 전형적인 아집입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능력입니다. 마음을 열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타인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은 이 시대의
입니다. 복 받을 일이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듣지도 않고 판단하는지요?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자연의 속삭임도 외면합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소리에만 반응합니다. 복음의 유다인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열면 새로운 소리를 듣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만큼 자유롭고 풍요로워집니다. 하지만 닫힌 마음에는 들리던 소리도 작아집니다. 늘 보이던 것도 희미해집니다. 당연히 움켜쥐게 되지요. 놓으면 달아날까 두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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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자유는 이렇듯 가까이 있습니다. 자유를 느껴야 진리가 되고, 진리가 아니면 자유를 주지 못한다는 표현입니다.
자유는 홀가분합니다. 불안을 제압하는 기쁨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완벽한 그 자유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답변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유 역시 깨달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에게서 그 자유를 찾습니다. 그의 자손임을 내세워 종살이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매여 삽니다. 율법 때문에 예수님마저 배척하려 합니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무엇에서 자유를 찾고 있습니까? 재물이 아닌지요? 재물을 자유의 출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재물 때문에 신앙마저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면 유다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유는 선물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간다면 누구에게나 그분께서는 주십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도 다소 긴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31절과 32절 두 말씀에 초점을 맞춰 깊게 묵상하면 족하다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곧잘 믿음이 최고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토로하는 것과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도대체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은 또 어떤 경지를 일컫는 것인지 바르게 알아들어야겠습니다
.

오늘 복음에 있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강한 저항을 표시합니다. 자기들은 종노릇한 적이 없노라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적손들이라고. 이 말씀들을 깊이 알아듣는 것은 우리 영적 여정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자유로움이 어떤 경지인지 알아듣는 것만큼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이 알아들음의 정도에 따라 우리 삶의 질과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말입니다
.

우리 삶은 정녕 자유롭습니까?
?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배운 게 없어서, 돈이 없어서, 높은 지위나 권력이 없어서, 건강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진리를 깊게 알아듣고자 하는 열정에 목이 타고,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 온몸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린 오늘 이 복음을 붙들고 깊게 자맥질해 들어가고자 하는 바람과 용기가 움터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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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모 방송사에서 ‘부자 되는 법’에 관한 특강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자 되는 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잠시 보았지요. 강사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부자 부모 밑에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잣집 사위나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일까요? 방청석에서는 ‘로또, 복권’ 등을 외칩니다. 이에 대해 강사는 “로또에 당첨될 확률도 극히 낮지만 설사 당첨이 된다 한들 선례로 보면 그 돈을 다 탕진하고 거의 모두가 예전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힘들게 벌지 않은 돈은 물거품과 같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지하게 강사의 말을 듣습니다. 강사는 세 번째 방법이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세 번째 방법은 가장 확률이 높은 것으로, 바로 스스로 노력하여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방법. 어떻습니까? 간단하지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부자 부모나 부잣집으로 장가 시집가는 것보다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확률 높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열심히 노력하면 될까요? 물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되는 것은 부자 되기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구원의 키를 쥐고 계시는 주님의 자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죄’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죄로 인하여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죄에 대해서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 있을까요?

사실 죄를 지으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는 있지만, 실제 마음에서는 불안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굴레에 걸려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 대축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며,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통회와 고백을 통해서 보다 더 깨끗한 내가 될 때, 진정한 자유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흙무더기이다.(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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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두 모습  

-오민환-

 

어제 복음까지 예수님은 유다인들로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요한 복음을 며칠 읽다가 루카 복음을 읽지만 연결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
오히려 앞선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를 방문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묵상하다 보면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천사가 떠오릅니다(창세 18,1-16 참조). 유다인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지요. 나이든 사라가 임신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대해 유다인과 예수님의 논쟁이 있었지요.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다윗 집안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임마누엘예언이 현실이 되었습니다(이사
7,14참조).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젊은 여인마리아는 이 인사말을 곰곰이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듣는 이의
자세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닥칠 엄청난 사건도 주님의 종이 됨으로써 평화를 얻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논쟁을 벌이던 유다인들과는 전혀 다른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성지 주일을 앞두고 이렇게 우리는 신앙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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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서의 자유

-김찬선신부-

 

자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 법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하다 보니 법을 어깁니다.
진리를 일부러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보니 진리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
하느님의 계명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 자기 마음대로 하다 보니 계명을 거스를 것입니다
.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하고
자유야말로 인간의 존귀함과 행복의 조건입니다
.
예를 들어 먹고 싶지 않은데도 먹어야 한다면
  그것이 산해진미라 해도 먹는 것이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유의 기준이 자기 마음대로 함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 마음대로 함이 진리를 거스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이는 마치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반대 차로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
인간에게 그런 자유가 주어지긴 했지만 
반대 차로로 가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거스르면 자기도 남도 죽게 됩니다
.

그러므로 참 자유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참 자유는 자연스럽고 진리 안에서 편안해야 하고
죄의 자유가 아니라 순종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
물살을 거스르는 것도 자유지만 흐르는 물을 따르는 것도 자윱니다
.
그러므로 스스로 진리와 하느님 뜻에 자기를 맡기는
  능동적 수동태야말로 참 자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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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자유

-전삼용신부-

 여느 아이들처럼 저도 어렸을 때 오락실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헌금하라고 동전을 주시면 성당에 안 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하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아채시고 저를 매우 혼내셨습니다. 다음번엔 주보를 가져오라기에 성당에 일찍 가서 주보를 가지고 나와서 오락실로 향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웬만한 오락들은 기록을 깰 정도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동전 한두 개만 있으면 미사 시간과 얼추 맞게 끝나곤 하였습니다. 그것도 돈이 모자라자 부모 지갑에서 돈을 훔친 아이와 오락실에 함께 가서 그 돈으로 함께 오락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여라 가지 나쁜 방법들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에 컴퓨터가 있어 하루 종일 그런 불안감 없이 편안하게 오락을 하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컴퓨터만 한 대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컴퓨터를 갖게 되었지만 컴퓨터로 오락을 해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컴퓨터로 오락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락을 해 보니 오락에 집중하는 시간에 신체의 에너지가 그 무엇보다도 많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만 허비시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오락을 절대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끊지 못하던 것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좋지 않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그저 사실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깨달음이란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미워하니 나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나를 위해서라도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려하면 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미움도 사라지고 그 이후로는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단순히 아는 것으로는 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브레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세븐을 알 것입니다. 세븐은 한 살인자가 세상의 죄악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7죄종, 즉 탐식, 탐욕, 나태, 정욕, 교만, 시기, 분노의 순서대로 살인이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시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한 그 범인을 죽이려고 하는 브레드 피트와 멀리서 그러면 지는 것이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모건 프리먼의 장면은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아직 머리에 생생합니다.

경찰이 자수한 범인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브레드 피트는 갈등 끝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범인을 죽이고 맙니다.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을알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깨닫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경찰도 나머지 6명의 죄의 노예들 틈에 끼게 된 것입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7죄종에 나오는 것처럼, 먹는 것, 갖는 것, 나태해 지는 것, 성적인 욕망, 명예욕, 시기질투, 화나는 때처럼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란 자유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죄든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권력이나, 쾌락, 돈 등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죄의 종살이라고 표현하시고진리의 참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겐 결코자유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씀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이 진리를 통해 우리의 본질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고, 이 변화가 죽음과 부활, 즉 세례를 사는 삶이고 또 회개라고도 합니다.

영화에서 어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제발 누가 나 좀 말려줘.”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도 자신이 컨트롤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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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내 사랑> -양승국신부-

 

'진리가 너희를'

-유광수 신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감옥, 죄의 감옥, 율법(모든 법)의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이 감옥에서부터 꺼내주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다. 즉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도 감옥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누가 우리를 이 감옥에서 꺼내 줄 수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가?
하느님만이 감옥에서 인간을 꺼 내 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해방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 자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다른 분한테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를 선물할 수 있는 분한테서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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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에게 이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유를 갈망해왔는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돈을 벌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고 배우고 하는 모든 것은 알고 보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굶주려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자유는 내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선물은 오직 한 분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한테만이 이 자유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자기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 자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명목아래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또 다른 도전을 받고 원수가 되고 구속받는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신약에서 진리란 단어는 25번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16번을 요한 복음에서 사용하였다.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어떤 사상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란 예수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을 말한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는 것이 다 진리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안에 사는 것이 곧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이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말씀에서 길러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사는 것이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말씀에서 길러내려면 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말씀을 되새긴다는 것은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생활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진리를 생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즉 깨달은 그 말씀대로 나도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진리를 깨닫고 생활할 때 주어지는 결과이다. 진리를 깨달아야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잘못된 것을 알아야 거짓에서 진리에로 돌아올 수 있다.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 설 때 거짓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대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Comme Ce Jour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자유"라든지 "홀가분함"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가출(家出)을 시도하고, 또 어른들도 출가(出家)를 염원하는 것 같습니다.  

틈만 나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왠지 모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의 부담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왠지 모를 이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마음뿐이지요. 몸은 언제나 바닥을 헤맵니다. 뭔가가 뒤꿈치를 늘 붙잡고 있는 듯 합니다. 늘 무엇인가에 억눌려 부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왠지 뭔가 부담스럽고, 뭔가 어색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인생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의 목표, 삶의 본질적인 의미, 존재의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항상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존재 이유랄까 삶의 의미는 항상 하느님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분의 손바닥 위에 살아갈 때,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의미를 발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듯 합니다. 그분 안에 쉬기 까지는, 그분께 닷을 내리기까지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네 삶인듯 합니다

때로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때로 중압감을 주는 듯하지만 그분 말씀과 계명의 핵심을 깨닫기만 한다면 결국 감사만이 남게 됩니다. 기쁨과 찬양만이 남게 됩니다. 행복함만이 남게 됩니다

성서 모든 말씀의 종합은 사랑입니다. 성서 말씀의 최종적인 결론이자 핵심은 우리 인간을 향한 그분의 측은지심이자 자비입니다. 모든 계명을 다 요약하면 결국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질책도, 그분께서 보내시는 십자가도, 견디기 힘든 시련도, 끔찍스런 경고 말씀도 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성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십시오. 글자 그대로만 해석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성서 말씀을 이루고 있는 모든 단어 하나 하나 그 이면에 숨어있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찾아보도록 힘쓰십시오.

결국 그분은 어쩔 수 없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받아들여주시고, 어쩔 수 없이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연민과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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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 마음 몰라

   반영억 신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 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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