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루가18,9-14)

2011. 4. 2. 오전 7:28:30

글자

2011년 4 2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묵상

한 수도원에 고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 가까이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매춘부의 집으로 사내들이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점점 돌무더기가 커지자 수도사는 매춘부를 불러 그 돌무더기를 보여 주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며 나무랐습니다.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통회하였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수도사도 매춘부도 함께 데려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매춘부는 천당으로 인도되고 수도사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사가 항의를 했습니다. “일생 동안 금욕과 절제 속에서 신을 경배하며 살았던 나는 지옥으로 가고, 일생 동안 간음죄만 지은 저 여인은 하늘 나라로 가게 되다니 말이 되는가?” 신의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수도사여 , 신의 심판은 공평하다. 너는 평생 수도사라는 자만심으로 명예만을 지키고 살며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은 베풀 줄 몰랐다
.”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우화는, 인간은 본성이 나약해서 수없이 죄에 걸려 넘어질 수 있지만, 그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교만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히려 세리가 바리사이보다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

 

 

바리사이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기도 내용처럼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단식과 소득의 십일조에 충실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보다 세리를 더 칭찬하십니다. 바리사이가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사의 기도가 되었더라면 그 역시 칭찬받았을 것입니다.
많이 가지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재능이 많으면 드러내고 싶고, 자리가 높으면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본능에 시비를 거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랑에 앞서 먼저 감사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불쌍한 세리와 비교해 자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리사이의 좁은 소견이었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죄와 연관된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기도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한마디뿐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깨달음을 안고 돌아갑니다. ‘자신을 낮추었기에은총이 함께했던 것입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나무는 온몸으로 낙엽을 떨어뜨립니다. 그래야 새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지 않은 낙엽은 봄이 되면 오히려 구차해 보입니다. 새싹이 돋는 것을 방해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

 

 

청주교구의 감곡성당은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충주 목사(牧使)였던 민응식의 집터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이곳이 성당으로 바뀐 데에는 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장호원을 지나면서 동쪽 언덕 아래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봅니다. 순간 그는 이끌리듯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저 대궐 같은 집을 주신다면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는 성전을 짓고 평생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이 일은
일 년 뒤에 현실이 됩니다. 1895 10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민응식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 것입니다. 이듬해 부이용 신부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그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고는 한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80평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오늘날의 감곡성당입니다.
애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잊더라도
때가 되면 들어주십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한마디 말만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랑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아이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 

 

죄는 관계를 단절시킨다.  -전삼용신부-

제가 사는 기숙사 정문은 센서로 열리고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센서가 문기둥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서로 빔을 쏘며 통행자를 감지합니다. , 서로 간에 오가는 빔이 끊기면 그 앞에 사람이나 차가 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문이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비가 오거나 해서 센서에 먼지가 묻어있기 때문에 서로 오가는 빔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작동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센서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면 그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도 이런 먼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서로 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빔을 막아서 관계가 끊어지게 만듭니다. 물론 사람의 관계보다 먼저 끊어지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유는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 교만이 죄이고 관계가 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행복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면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그렇게 행복이 사라지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역시 이것은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미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곧 지옥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은 원죄를 물려받음으로써 그렇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관계를 다시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센서에 낀 때를 닦아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 마음을 닦아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씻는 능력을 받았고 그래서 베드로, 즉 교황님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말 안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로 당연하게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만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더 크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교만하게 기도하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세리는 주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느님께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겸손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인간을 보시면서도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목표는 그 죄를 씻어주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당신을 더 사랑해주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의 회복은 죄, 즉 교만을 씻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해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 죄가 사해지기 시작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는 관계를 끊고 그래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항상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의 센서를 유지할 것을 결심합시다.

올바른 사람은 누구?   - 정호 신부-
한 주간 복음의 내용이 하느님이 정말 원하시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듯 지켜야 할 계명과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들이 우리의 귀에 울려 퍼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전히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은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활로 들어서면 으레 그렇듯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이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우리 생활에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바리사이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잣대로 생각해 봅시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서 진실된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도 알고, 그는 욕심도 없고, 부정직하지도, 음탕하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세리와 같지도 않답니다. 게다가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남 앞에서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기도는 제쳐놓고라도 우리가 대단하다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신자들을 최고로 꼽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최대한 비굴한 자세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뭐 하나 드릴 것이 없어 한다는 기도가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입니다. 남들이 보아도,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생각해보아도 뭐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세리입니다. 그런 그의 이런 모습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우리에게 판단 받는 모습입니다.

자랑할 만한 사람의 기도와 자비를 구걸해야 할 사람의 기도. 그런데 복음의 결론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 역시 세리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무엇이 하느님께 올바른 것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세리. 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삶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자세였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나무랄데 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거리였다면 그것은 그런 삶의 이유가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을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모범이라 할 만 하지만 그것을 그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위한 자랑으로 드러냈으니 그는 하느님 앞에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자랑한 것이며, 그것은 이미 자신 안에 하느님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차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자랑스러운 기도가 바로 자신을 하느님 앞에 부정직하게, 또 음탕하게 만드는 시도가 되고 있음을 자신은 모릅니다. 더군다나 이런 자신의 모습 속에서 사랑해야 할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하느님 앞에서 짓밟고 있기에 그는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반면 세리는 우리가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부족함을 압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다가가셔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그런 삶에서 구해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하시며 말입니다. 그런 세리였기에 그가 한 일들이 잘한 일이 아니라 그는 언제든 그 삶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기에 하느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삶의 모습이나 질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남을 판단하려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앞에서 같다는 사랑의 평등함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 앞에 정성을 다하는 모든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지켜내고 나누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바리사이파가 세리의 손을 잡는 마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일을 하느님 앞에 드러낼 양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랑하기 전에 하느님이 그 사실을 모르실리 없잖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루가18,9-14)

-유광수 신부-

오, 하느님이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는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앙생활의 두 모델을 본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 두 부류 중에 한 가지 한 부류에 속한다. 즉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세리와 같은 모습의 신앙생활이다. 나는 과연 어느 부류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바리사이파의 모습인가? 아니면 세리의 모습인가?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였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세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나쁘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오래 몇 년 동안을 지나고 나면 허리에 디스크가 올 수 있듯이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고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은 똑같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며 또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강도 짓을 하지도 않고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기까지 하니까 신앙생활도 얼마나 열심한 사람인가! 하나도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다.

그의 말만 들으면 모두가 칭찬 받을 일이며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세리는 너무나 초라하다.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저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좋은 일을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했다는 내용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죄인이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세리를 칭찬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되는 판결을 내리셨다. 우리가 볼 때에는 분명히 바리사이파가 더 훌륭했고 세리가 못 살은 사람이었다. 아마 우리는 너도 가서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교회에 교무금이나 봉헌금을 많이 내고 교회에서 지키라고 한 것이나 열심히 지키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잘 들어보면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결국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모든 내용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였지 남을 위한 기도라거나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자. 그 사람의 기도의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선 기도를 시작하는 단어가 "제가"라고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 즉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는 그들과는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다 들추어내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는 잘 살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강도짓, 불의를 저지르고 간음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바쳤다고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있다. 스스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내용에는 자기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정말로 감사 드린다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한다든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사람들은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말하고 있다.

 

한편 세리는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잘못을 청하고 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비판한다거나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있다. 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못 살았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세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한 중앙에는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나가 있고 세리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아니라 한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기 자신의 삶의 한 중앙에 "자기"가 있는가? "하느님"이 계신가? 의 차이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무엇을 하든 즉 기도를 하든, 좋은 일을 하든 항상 그것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이다. 즉 자기라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한편 세리는 자기가 아닌 하느님이 한 중앙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한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야 하고 묵상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잘못된 나의 신앙생활이나 생활을 올바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냥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고 잘못하고 있는 지를 알 수가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도 자기가 잘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 즉 세리가 잘못생활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 나와서 자기가 무척 잘한 것처럼 떳떳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꼿꼿이 서서"
라고 복음은 바리사이파의 자세를 정확하게 적었다. 즉 남이 보라는 뜻이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고 그래서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정확하다. 그리고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욕심과 독선으로 남 위에 서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감사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잘난 사람이 세리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세리의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사랑하며 산다면 그것이 곧 올바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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