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사순 제4주일-요한 9장 1-41절)

2011. 4. 3. 오전 5:45:35

글자

 

2011년 4 3 사순 제4주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9,1-41)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희망의 창문 하나>

     오늘 오후, 가까운 본당 어린이 미사 도와드리러 제의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의를 차려놓았는데, 아 글쎄, 제의 색깔이 제겐 너무나 부담스러운 ‘분홍빛’이지 않겠습니까?     머리 털 나고 한 번도 빨간 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옷을 입어본적이 없어, 잠시 망설이다, 에이 모르겠다며 입고 거울을 한번 봤더니,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부조화’였습니다. 겨우 웃음을 참으며 입당을 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에 사제들은 미사 때 교회 전통에 따라 장미색 제의를 입습니다. 그 이유는 사순시기를 지내느라 지쳐있는 신자들에게 살∼짝 기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성삼일과 부활이라는 교회의 가장 큰 축제, 전례주년의 가장 큰 산을 넘기 위해 대축제를 준비하느라고 에너지 소모가 많은 신자들에게 장밋빛 제의를 통해 희망의 날이 도래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요즘 거의 ‘기업형 농사’를 짓느라 허리 펼 날이 없습니다. 근사한 밭이 만들어졌고 씨까지 왕창 뿌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결실입니다. 수련회 오는 청소년들에게 무공해 야채를 마음껏 먹일 생각에 다들 꿈에 부풀어있습니다.     그러나 농사란 것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농사가 잘 되려면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됩니다. 먼저 영양가 많은 넉넉한 퇴비로 밭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수분이 제 때 제 때 공급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잡초제거, 추가비료...    그러나 아무리 이 모든 것들이 다 충족되었다 할지라도 이것 하나 빠지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적절한 태양 볕입니다. 빛 한줌 들지 않는 캄캄한 음지에서 견뎌낼 식물은 거의 없습니다.      강렬한 태양 아래 복숭아며 사과며 포도 열매는 단단히 영글어지고 당도를 더해갑니다. 한 햇살에 힘입어 어린 모종들은 무럭무럭 키가 커집니다.

     빛이란 것,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우 형제자매들 뵐 때 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얼마나 큰 상실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생명을 되찾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우를 만나십니다.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 씻게 합니다. 결과는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사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많은 경우 진정으로 눈을 뜨고 있지 못합니다. 꼭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한 줄기 감미로운 바람처럼, 가슴 뛰게 하는 선물처럼, 한 줄기 빛으로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간 눈 못 뜬 상태로 어둠속에, 죄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우리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생명과 희망의 창을 하나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창으로 하느님 사랑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뿐이던 우리 인생이었으나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 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고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뵙기위해서 먼저 그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결국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34,16)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11,3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보내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행하는 가운데 빛이신 주님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오늘 첫주일은 자선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베풀 때 하느님의 눈에 꼭 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드는 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은 육안, 심안,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혜안이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에페1,18).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

사랑합니다.반영억신부

 

 

오늘의 묵상

“블랙”(Black)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중복 장애인 헬렌 켈러의 생애를 각색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아름다운 대사들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빛이 없는 곳에서는 성한 눈도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한마디가 오래오래 가슴속에서 맴돕니다. 우리가 모두 성한 눈을 가지고 다닐지라도 빛이 없다면 눈은 쓸모없는 기관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안 계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는지요? 어느 날 불현듯 엄습해 온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안 계시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우리 모두 길을 잃고 어둠 속을 지치도록 헤맬 것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우리 존재가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빛이심을 드러내시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는 이제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주님을 선포합니다. 보지 못하던 자가 진정으로 보게 되었고, 육신의 눈이 성한 사람이 오히려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밝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을 깨닫고 살지 못하면 우리의 성한 눈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빛이 없기에 그의 영혼은 어둠 속에 있을 뿐입니다. 세상 것에만 눈이 밝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일 수 있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면 보이는 하느님과 이웃

-이기양 신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소연했지요.  "선생님, 사람들이 왜 저를 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이미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던 선생은 그를 창가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십니까?"하고 물었지요.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은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 모습이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자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당신의 모습만 보일까요?"

우리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마음의 때가 끼면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유리창을 닦아내는 이유는 밖을 잘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창을 유리처럼 맑게 해야 하느님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바리사이와 같이 아집에 사로잡힌 존재인지 아니면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는 기적의 사람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소경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안식일 법에 집착해 점점 판단력을 상실해 가는 눈 뜬 장님과도 같은 바리사이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조차도 볼 수 있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아집에 사로잡혀 너무나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이 눈 뜬 장님이 아닌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처음 세례 받을 때에는 마치 눈먼 이가 눈을 떴을 때처럼 모든 것을 경이롭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먼지가 쌓이고 양심은 무뎌져서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안 보이고 이웃도 안 보이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목자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달마 대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나이가 들수록 아집이 단단해져서 감동할 줄 모르고,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며, 내 것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자신을 지배하는 아집을 허물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회와 시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지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다가오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바리사이와 소경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한다면 바리사이의 모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 이웃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면 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며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듯이 복음으로 우리의 내면을 정화해야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늘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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