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요한8,1-11)

2011. 4. 11. 오전 6:40:41

글자
 
 2011년 4 11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요한 8,1-11)

 

 

말씀의 초대

 수산나는 의로웠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두 원로가 음욕에 빠져 수산나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음으로 몰아가자, 하느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시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신다(1독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와, 율법에 따라 돌로 쳐야 한다며 예수님께서 단죄하시기를 종용한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사람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시자 그들은 떠나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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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율법이 돌판에 새겨진 계명에서 비롯되었다면, 예수님의 법은 땅바닥의 흙 위에 새겨져 시작되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계명은 지울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흙 위에 손수 새기신 계명은 언제라도 지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법은 흙 위에 새긴 글자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한 여자를 붙잡아 데려옵니다. 율법을 들이대며 이런 여자는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들은 돌판에 새겨진 계명을 들먹이며 예수님께서 단죄하실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굽히시어 당신의 계명을 흙 위에 쓰고 계십니다. 손으로 땅바닥을 한 번 쓸고 나면 율법도 죄도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그런 법을 쓰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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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소리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랬더니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떠나갑니다. 그들이 돌을 내려놓고 그 여인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자신들도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 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기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돌을 던지지 않은 것은 그 여인도 죄가 없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은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의 본래의 품위까지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제 그 여인을 단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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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흙 판 위에 새겨진 당신 사랑의 법으로 우리 죄를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서 흔적도 없이 지우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얼굴을 들고 다시 살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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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거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바리사이뿐 아니라 구경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무엇인가 땅에다 계속 쓰고 계셨습니다. 악의에 찬 질문에도 그분께서 보여 주시는 배려입니다. 마침내 질문자들은 한 사람씩 자리를 뜹니다.
모두 가 버리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모두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인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갔겠습니까? 회한과 감동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단순하고 따뜻한 사람이 밝은 인간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러니 하느님께도 밝은 관계를 지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에 대한 생각이 밝으면 신앙생활도 밝아집니다. 간음한 여인보다 그녀를 고발했던 사람들이 더 어두웠습니다. 그들은 벌주시는 하느님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오늘 복음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감동적인 내용이 아니면 알려질 리 없습니다. 무엇이 그러한 감동을 남겼겠습니까? 용서입니다. 모두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넓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예부터 간음은 여자의 크나큰 잘못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가혹한 벌로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찌 여자만의 잘못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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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는지요?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그분처럼 말할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말씀이 되돌아와 우리 삶을 감싸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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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밝은 생각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간음한 여인보다 그녀를 고발했던 이들이 더 어두웠습니다. 그들은 벌을 주시는 하느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삶이 바뀌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바뀌게 합니다.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반영억신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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