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 돌을 치워라!(요한 11,1-45)

2011. 4. 10. 오전 5:56:09

글자
 
 
 2011 4 10일 일요일 사순 제5주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나자로야 나오너라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은 죽음처럼 암담한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이 해방은 하느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행하실 더 중요하고 보편적인 해방의 징표이다(1독서. 에제키엘  37,12ㄷ-14). 비록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의 의로움 때문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2독서). 라자로의 소생은 주님께서 생명의 주재자이심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신 것은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복음 .요한 11,1-45).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인간 존재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설움에 복받쳐 우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함께하며 그 슬픔을 나누십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캄캄한 죽음 속에 있던 라자로는 주님 사랑의 능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은 우리를 모두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우리는 언제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소통하지 못할 때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단절되어 있으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주님과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안에 막혀 있는 돌 때문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숨 쉬기조차 힘들게 하는 단단한 돌이 박혀 있어서입니다. 미움, 분노, 집착, 탐욕 등이 단단하게 뭉쳐져 마음의 돌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돌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막혀 있는 돌 너머에는 빛이 없는 어둠만 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곳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라자로의 무덤처럼 시체가 썩고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십니다. 돌을 치워야 빛이 들어오고 소통이 시작됩니다. 라자로를 살렸던 주님 사랑은 우리 무덤가를 떠돕니다. 우리가 돌을 치우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돌처럼 뭉쳐 있는 마음을 어서 풀어야 합니다.

 

☆☆☆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라자로는 부활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새 목숨을 얻은 라자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부활 은총의 핵심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못 믿을 것이 없습니다.
부활의 은총은 지식으로 접근하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론이 아닌 까닭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이 체험이듯 부활은 체험이어야 합니다. 내 몸과 마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부활해야 살아 있는 은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순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라자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아직도 수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순간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떤 느낌으로 오빠의 움직임을 지켜보았겠습니까? 두 사람의 변신 역시 궁금해집니다.
내 안에는 라자로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믿을 수 없다고 제쳐 두고 있는 라자로의 죽은 모습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을 걸어오시면 언제라도 인생은 바뀔 수 있습니다. 라자로처럼 소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눈물을 아시는 예수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우셨을까? 루카19,41에 보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 멸망할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7)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게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는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하시고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에 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고통에 가슴으로 함께하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눈물을 아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곳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자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들이 슬프게 운 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깊지 못한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그들의 슬픔은 순수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슴도 그 슬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 보면 눈물도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도 보면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주 우십시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곳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가끔은 대성통곡하십시오. 아무 곳에서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성체 앞에서 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묵시21,4에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눈물을 흘리십시오. 인간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곤경에서 구해 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얼마인데, 남자자 이런 일로 울다니하지 말고 실컷 우십시오! 울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에도 좋습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흘러나오는 눈물에는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로몬이 많이 붙어 있는데 이 호로몬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 몸에 대량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이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만성위염 같은 소화기 질환이 생기고 혈중 콜레스테롤이 높아져 심근 경색이나 동맥경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 나쁜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매개체가 눈물이랍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면역세포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웃음이 파도라면 울음은 해일이 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여 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래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집안 식구들이 울지 못하게 하셨어요……그래서 눈물을 흘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당신은 남몰래 실컷 우시더라고요.그래서 지금껏 사시는 것 같애요.

 

어떤 연구가들은 눈물에 존재하는 항생물질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항균 효과가 그리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파를 까놓고 눈이 매워 흐르는 눈물보다는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눈물이 진짜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살아나거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무덤 앞에 섰을 때 이미 라자로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이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영생의 새삶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죽음에 공감하시기 때문에 인간적인 처지를 활용하여 통쾌한 승리를 보여주십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 자. 입니다. 무력하다.입니다. 우리는 무력하기에 주님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덤입구에만 가도 썩은 냄새가 나는데 그 무덤을 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에 따라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오너라! (전지전능하신분이십니다.)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

 무슨 얘기냐 하면 진짜 죽는 것은 내가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선입견, 똥 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질투, 분노, 증오, 집착, 소유,지배, 명예욕 교만함 등등. 이런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무덤에서 나오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바로 그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웠습니다. 마르타는 냄새 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은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 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옭아 매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하고 화해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그분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 묶인 것을 풀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머니, 매괴 성모님, 수난 받으신 성모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움과 증오, 분노의 총을 맞고도 흔들림 없이 성당중앙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천상을 바라보시며 모든 것을 품으신 어머니처럼 우리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모두를 감싸 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돌을 치워라!
 
 

오랫동안 피정지도를 하면서 해외피정도 많이 다녔습니다. 아마 이북을 빼고는 피정지도를 안 다녀본 데 없이 다 다닌 것 같습니다. 피정을 다니는 것이 어찌 집만큼 편하겠습니까? 본당만큼 편한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입는 거, 먹는 거, 자는 거, 비행기 여행 어느 거 하나가 다 불편하지만 해외피정을 다니면서 늘 저는 바오로 사도의 삼차 전도여행을 생각해봅니다.  걸어서.... .도둑들에게 당하고 강도들한테 얻어맞으면서.... 때로는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알리고자했던 바오로 사도의 그 고생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록 힘은 들지만 교포들이 말씀을 통해 치유를 받고 기쁘게 다시 살아나가는 힘을.... 그 피정을 통해서 드러날 때 사제는 행복합니다.

이 주일강론 역시 동영상으로 전 세계로 퍼집니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빌어  강론을 보고 계신 호주신자들에게도 25일 동안 잘 있다 왔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퀴즈 같지 않은 퀴즈를 한 가지를 내겠습니다. 맞추시는 분들은 나중에 사제관으로 따로 오십시오. 초인종을 눌러 보고 안 나오면 그냥 집에 가시면 됩니다.^^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시고....사람 시체 썩을 때 나는 냄새와 동태 한 마리가 썩을 때 나는 냄새와 어느 쪽이 더 역겹습니까? [사람 썩을 때요.] 확실합니까?  예~~ 한분만 맞출 줄 알았더니.....^^ 맞습니다.  생선 한 마리 썩을 때 나는 냄새도 역겹지만 사람 송장이 썩을 때 나는 냄새도 역겹죠.

오늘 예수님이 라자로 죽은 무덤으로 가니까 그 누이가 뭐라 그럽니까?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이미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역겹습니다.’다시 말하면 사람이 귀한 존재입니까? 생선 한 마리가 귀한 존재입니까? 사람이죠?

풀이하면 귀하고 비싼 존재일수록 썩을 때 보면 냄새가 더 더럽습니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사제가 잘못 살아서 풍기는 냄새는 평신도들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보다 훨씬 더 역합니다.  수녀들이 잘못 살아서 풍기는 냄새는 레지오단원들이 잘못 살았을때 풍기는 냄새보다 훨씬 더 역하고 더럽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는 이방인들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는 훨씬 더 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사셨고....세례때 물과 성령으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이라고 하는 한 직위로 우리를 올려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사제들은 더 특별히 선택을 받았습니다.

거룩하고 귀한 존재일수록 한번 추락하기 시작하면 그 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역하고 그 주변에는 많은 상처를 받고 실망 속에서 좌절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받은 우리들은 늘 건강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변질이 되더라도 썩지 않아야 될....  선택이 아닌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라고 하는 세 오누이가 살았는데 라자로가 죽을병에 걸려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들은 척 만 척 별로 신경도 안 쓰십니다.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일부러 안 가는 것도 같고... 아주 속을 태웁니다.

결국에 라자로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라자로가.....죽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장례 다 치루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이 어슬렁어슬렁 오셔서 시체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썩어가는 라자로를 부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주제를 가지고, 아니면 흐름을 가지고, 오늘 복음에 나온 중요한 말마디 다섯 개를 가지고 묵상을 같이 하고자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말마디 두 개는 治癒 二言 치유를 시키는 두 가지 말씀, 세 가지는 蘇生 三言....뭐라구요? 다른 말로 復活 三言!

 치유를 시킬 때 반드시 필요한 말 치유이언(二言) 가운데 첫 번째가 3절에 나옵니다.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의 문을 여는 첫 번째 말입니다다시 말하면 오순도순 살고 있던 삼남매가 라자로가 앓고 있을 때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한 말이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남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하던 기도의 99프로는 나와 살과 피가 섞이고 내 집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겁니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해보신 적은 있어도 여러분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눈물로 매달려 본 적은 있어도... 남을 위해서 기도하며 눈물 흘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늘 주변사람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살아가면서 너무너무 몸이 아프고 마음도 아플 때는 "하느님 살려주세요!" 하는 말도 안 나올 때가 있죠?  있어요.... ‘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하는 그런 절망의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살려달라고 손도 내밀힘조차 없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주님! 주님이 사랑하는 이가 저렇게 앓고 있습니다.’우리는 자주 주위의 환자들을 대신해서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 드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피정지도를 할 때마다 많은 환자들이 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긴 피정동안 앉아있는 그들을 보면서 저는 치유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 주님이 사랑하시는 저기 저 암환자, 저 중풍환자, 뼈와 가죽밖에 안남은 저 암환자,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며 치유를 바라며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오늘 이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저 앓는 이들을 제발 좀 치유시켜주십시오.’미사 때 신자들을 바라보면 느낌이 와 닿습니다.

‘예수님, 미사 드리는 저 루시아 얼굴이 밝지를 않습니다. 뭔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치유시켜 주십시오. 베드로 얼굴이 오늘은 대단히 어둡습니다. 오기 전에 마누라랑 한바탕하고 온 것 같습니다. 치유시켜주십시오.’

이 세상에 의술로도 해결이 안 되어 죽는 날만 기다리며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께 매달리는 그들을 위해서 사제는 피정 때마다 미사 때마다 기도합니다. 청원의 기도로 부탁을 드립니다. ‘저들을 제발 좀 살려달라고....’바로 오늘 3절에 나왔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성경책 갖고 계시는 분, 펜이 있으면 줄을 그으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주변 사람들을 봉헌해야 됩니다. 피와 살이 섞인 내 가족들만 봉헌할 것이 아니라....오늘 예수님께 알려드리는 이 사람들은 마리아, 마르타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살도 안 섞인..... 친척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쫓아가서‘주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어떻게 좀 해봐주십시오.’


저는 늘 피정 때마다 믿음을 갖고 기도를 합니다. 주님께서 사제들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거 의심치 않습니다. 피정이 끝나고 난 다음에 많은 이들이 의학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어 정말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시드니 피정 때도 3개 도시를 다니며 피정을 시켰습니다.

개신교신자들도 수도 없이 많이 왔고, 냉담자들도 많이 왔고, 성당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도 왔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그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한 도시의 피정이 끝나고 그 다음 도시에서 피정을 시킬 때는 벌써  以前 도시에서 치유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이메일로 많은 편지가 들어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피정 때마다... 미사 때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이 기가 막히게 사랑하는 사람 하나하나..... 여기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고 몸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 끝날 때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치유시켜 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치유 이언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때로는 그 간절한 청을 듣고도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더 머무시다가 죽은 후에 나타나시었듯이 예수님이 야속할 때도 있습니다.  ‘아, 저 착한 사람이 저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아이들 셋을 두고 이제 40도 안 된 자매가 암에 걸려서.... 예수님, 제발 치유시켜 주십시오...’답을 안 하십니다. 묵묵부답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이 응답을 안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피정 때 짧아졌던 다리가 길어지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암덩어리가 한순간에 없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정에서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정 내내 아름답게 변하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육의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견딜 수 있다는 결의에 찬 모습으로 피정 끝나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은 물리적인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담대하게 견디겠습니다!>

 

물론 말씀을 안 드려도 알고 계시겠지, 하고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자주 그분에게 내 영혼의 상태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의 상태 등을 알려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합당하고 맞습니다.


치유 二言의 두 번째는 신앙고백입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몇 절에 나옵니까?  <27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너는 이것을 믿느냐!’<예,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활짝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거나 어떤 병을 고쳐주실 때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를 보셨습니다.

베짜타 연못에서 38년 앓아누웠던 그 앉은뱅이에게 뭐라고 얘기셨습니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지상태로 한평생 사는 것이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병자인데 본인 자신은 병자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낫기를 원하느냐!’요한복음에 베짜타 연못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 잘 알고 있는 하혈하는 여인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 저 옷자락이라도 잡는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그때 당시에 수백 명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건만 이 하혈하던 여인이 잡았을 때에 예수님은 ‘내 기운이 빠져 나갔다!’예수님을 생명을 다해, 목숨을 걸고, 전 존재를 걸고 잡은 사람은 열 두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그 여인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피정 때 수백 명이 오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하혈하던 여인이 옷자락을 잡는 마음으로 피정에 참석하거나 미사 때 그런 마음으로 앉아 있을 때...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은총을 주십니다.

예리고의 소경에게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도다!’  치유 이언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우리들은 이 사순절 마지막 시기에 소생 삼언과 치유이언을 묵상하면서 성주간을 맞이해야 될 겁니다. 소생 삼언의 첫 번째가 뭡니까?  “돌을 치워라!‘돌은 뭡니까? 걸림돌입니다.  가로막는 겁니다.

 

긍정적인 삶을 살아라!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라! 생각을 바꾸어라! 상처만 후벼 파지 말고 네 앞에 쏟아지는 은총의 빛을 보아라! 자꾸 돌아보지 말아라! 뒤돌아보면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축복도 많다는 명심하거라! 너희가 정말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최선을 다하라!   나와 하느님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을 치워야합니다. 사순절은 남편과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돌을 치워야합니다

부모와 자식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돌을 치워야합니다

사제와 신자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그 돌을 치워야합니다.

변화되는데 방해가 되는 돌을 치워야 됩니다.

교만의 돌  열등의식의 돌 죄악의 돌 악습의 돌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는 돌...이런 돌들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돌을 치워라!’이것이 소생 삼언의 첫 번째 말입니다.


두 번째는 ‘라자로야, 나오너라!’라자로야 나오너라!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 일어나라 '이겁니다. 죽은 라자로에게 외친 예수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우리도 언젠가는 무덤 속에서 들어야 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상여에 실려 나갈 때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시니 일어섰습니다.삶과 죽음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죄에서, 과거의 상처에서.. 내 악습에서 우울증에 갇혀서...컴컴한 동굴 속에 갇혀서 손발을 묶인 채 죽어갈 것이 아니라... 나와야 합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나를 짓누르는 동굴 속에서 기어 나와야 됩니다.

예수님이 “라자로야, 나오너라!”했을 때 이미 생명이 들어온 겁니다.

죄 덩어리 몸 안에 주님의 성체가 들어온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 뼛속 깊은 곳까지 어둠이 물러나고 새로운 영생이 시작된 겁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베드로야, 나오너라!  루시아야, 나오너라!

엘리사벳아, 나오너라! 부활이 바로 네 앞에 있다!


미사 때마다 얼굴이 기쁨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당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얼굴이 똑같다면 이건 신앙인이 아닙니다.

비록 들어올 때는 세상에 찌든 얼굴이었다 하더라도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다시 일어서서 세상을 향해서 나갈 때는 새로운 얼굴로 변해야 합니다.


巢笙 三言의 마지막 말은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죄악에 빠져 살다가 하느님을 만나서 선하게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후에 주위의 기도와 사랑이 없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악습은 과거지향으로 흐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콜중독자가 쉽게 해방이 못 되고, 노름꾼이 죽을 때까지 노름에서 못 빠져나오고,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못 끊는 이유가 다 그렇습니다. 한 번의 피정으로, 한 번의 총고해로, 한 번의 뜨거운 미사로...영원히 죽을 때까지 성인성녀로 살 수 없습니다. 주위의 사랑과 기도가 없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 남편이 15년 만에 성사 본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냉담하던 자식이 6년 만에 성당에서 나온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수의를 벗어버릴 수 있도록 누군가 벗겨 주어야 합니다.

비록 몸뚱아리는 어그적거리면서 마누라 마음만 반반해서 억지로 끌려나와 성사를 봤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온몸에 수의가 감겨져 있습니다.  그거 깨끗이 풀어주어야 하느님 앞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사순절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 하다 보면 부활절입니다.

오늘 간단하게 말씀드린 치유이언(治癒 二言)과 부활 삼언(復活 三言)을 붙잡고 성주간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김웅열 T.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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