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8일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한 12,1-11)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선택하신 종은 자비와 사랑이 넘친다. 그분께서는 갈대가 부러졌다고 갈대를 꺾어 버리시지 않고 등잔의 심지가 깜박거려도 끄시지 않는다. 상처 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신다(제1독서/이사야 42,1-7).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값진 기름의 도유는 사랑을 상징한다. 온 방에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다(복음/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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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2 참조) 속에 예수님 발치에만 앉아 있던 마리아를 기억하시지요?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께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얼마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동을 지켜보는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동을 보자마자 곧바로 나르드 향유 가격이 떠오릅니다. 노동자 1년의 임금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 값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됩니다. 이런 비싼 향유가 그냥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냥 내보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불만의 정당성을 내세우려고 가난한 이들을 핑계 삼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의 관계’와 ‘이해관계’의 차이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산하거나 따지는 법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으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합니다. 사랑의 향기입니다. 반대로 유다는 머릿속에서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습니다. 정의를 내세우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일차적인 사랑 없이 가난한 이들을 팔아 내세우는 정의 뒤에는 권력욕과 탐욕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인의 중요한 덕목은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그다음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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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모십니다. 한때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리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가족 역시 남다른 마음으로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애틋한 정성입니다. 사람들은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색한 표정이 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되뇝니다. 정성을 ‘정성으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마리아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방문에 감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가 ‘아무리 비싼들’ 마리아에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순수함을 헤아려 보지 않았기에 낭비라고 판단합니다. 살면서 ‘쉽게 빠지는’ 잘못입니다. ‘너무나 쉽게’ 걸려드는 유혹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모두를 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마리아입니까? 유다의 모습입니까? 성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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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은
-*반영억라파엘신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이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