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6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5-56)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양 떼이다. 양 떼들은 두 목자 밑에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여 다윗을 영원한 제후로 삼아 평화의 계약을 맺고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에제키엘 37,21ㄴ-28).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들은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유다의 지도자에게는 예수님을 없앨 궁리를 하게 만든다. 이때 그해의 대사제였던 카야파는 의회에서 민족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예수님 한 사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복음 요한1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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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의 레위기에 보면 속죄일에 바치는 속죄 제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서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 하나는 산 채로 세워 두었다가 속죄 예식이 끝나면 광야에서 떠도는 귀신인 ‘아자젤’에게 보냅니다. 이때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와 그들의 허물을 이 숫염소의 머리에 씌우고서 불모지 광야로 내보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의하는 모습에서 마치 예수님을 두고 숫염소에게 죄를 씌워서 광야로 내보내는 구약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술렁대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사회 혼란과 로마의 위협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죄를 덧씌워서 희생 제물로 삼아 민족을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공동선과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희생시켰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실체가 없는 이름이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이든 교회이든 공동체가 가지는 이런 죄악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희생시킨 그 죄를 우리도 똑같이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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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희생양’은 있습니다. 죄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이들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다음 말은 ‘카야파’ 대사제의 발언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예수님께서 백성을 선동하시어 로마에 반기를 들까 봐 우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핑계입니다. 유다인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재가를 얻으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희생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아들이려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은 은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희생은 언제나 또 다른 축복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억울함을 당하고 불평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은 언제나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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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반영억라파엘 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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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야파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한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는 죽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비전이다. 즉 예수님은 그냥 살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비전을 갖고 실으셨는데 그 비전이란 모든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비전이다. 예수님은 이 비전을 위하여 사셨고 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첫째, 비전은 마음속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그림이다.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실현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비전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그려 줄 수가 있다.
둘째, 비전은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이다. 비전은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에 되고 싶은 가장 바람직한 모습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처럼 장차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가 비전을 품은 사람이다.
셋째, 비전은 가장 가능성 있는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때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우리 앞에다가 온다. 바로 그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달려가는 삶이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넷째,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거룩한 꿈의 다리이다. 몇 년 전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던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많은 인명 피해 외에도 성수대교를 통해 등하교하던 학생과 직장인들, 그리고 성수대교 양쪽의 상인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끊어져서 사람들이 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절망 속에 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때로는 불만스럽고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꿈이 있다면 희망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5,1-5)
비전을 품은 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품은 비전이다. 비전을 품은 자는 미래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 비전은 미래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신비스러운 힘이요,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비전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다리를 뛰어 넘어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도록 하는 거룩한 꿈이고 열망이다.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품게 해주시는 주님은 어제의 꿈을 오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내일에는 현실이 되어가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해주러 오셨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죽으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죽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전이고 그것을 위하여 죽으실 것이다.
세네칼은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죽는다. 인간은 죽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운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죽음을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도록 제시해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즉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길을 걷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라면 그것을 믿으면서도 그냥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곧 자살이다. 즉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가는 것이다.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자신의 목숨을 재촉하는 자살 행위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투신하는 것이다. 즉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이다. 결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전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세운 비전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제시해준 비전이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고 또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제시해준 비전을 예수님이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제시해준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또 자기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듯이 이웃을 위해 살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살하지 않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죽고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우리는 사는 방법도 예수님한테 배워야 하고 죽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로마1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