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에 담긴 의미>요한 10장 31-42절

2011. 4. 15. 오전 7: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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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요한 10장 31-42절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반영억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이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신비, 강생의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겠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요,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요,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랍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여야 하지만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돌멩이에 담긴 의미>

 

   예나 지금이나 단단한 돌멩이는 대단히 위험한 ‘살상도구’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돌에 맞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개구쟁이였습니다. 틈만 나면 동네 형들 사이에 끼어 산으로 들로, 천방지축 여기저기 몰려다니고, 놀러 다니기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많이 겪었습니다.

     한번은 형들 따라 다른 동네 ‘원정’ 갔다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시비가 붙었는데, 마침내 동네 아이들 사이의 패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처음에는 두 편 사이로 연탄재나 작은 돌들이 날아다녔는데, 나중에는 주먹만한 돌들까지 던져댔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제 뒤통수에 뜨거운 느낌이 있었는데, 그길로 저는 쓰러져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서 보니 적십자 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피를 얼마나 흘렸던지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 어질어질한게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던지. 사실 돌멩이 맞기 전까지 저는 나름대로 ‘한공부’했었는데, 그 뒤로 성적이 많이 떨어진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살상도구가 ‘돌멩이’인 것입니다. 사실 유다 근동지방, 아랍 세계에서는 사형방법 가운데 사형방법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 던지려고 다들 주먹만한 돌멩이를 하나씩 각자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살상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 멀고도 어려운 ‘육화강생의 여행길’을 걸어오셨는데, 그들의 보답은 돌팔매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눈동자는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가련한 동족들을 향한 구원의지와 연민의 정으로 이글거리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너무도 뜻밖에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이글거렸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손에 돌 하나씩 들고 부릅뜬 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제 마음 안에 ‘폭풍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제 눈동자는 분노로 타올랐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수 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싹쓸이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십니다.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로 설득하십니다. 제발 그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지막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저 홀연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의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참아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하시는 자비의 예수님이십니다.

     거듭되는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배은망덕, 무지와 그로 인한 숱한 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참아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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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요한10,31-42)

-유광수 신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55,8-9)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생각과 유다인들의 생각은 일치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고 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다.

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고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이고 죄이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과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보여 주셨는데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라고 말을 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한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죄이고 악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하느님은 진, 선, 미이시고 사랑이시다.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것의 빛이시고 생명이시다.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기원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늘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일을 하시며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신다. 진,선,미이시고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항상 좋은 일이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좋은 일이란 어떤 일일까? 물론 사랑이신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요약해서 말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까? 그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창조사업이요, 다른 하나는 구원사업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사업과 구원 사업에 대한 계획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갖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창조와 인간 창조를 그리고 나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덤빈다

마치 하느님보다 더 높이 오르려고 바벨탑을 쌓듯이 하느님만의 고유 영역인 창조사업과 구원 사업에까지 인간이 침범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 그것이 죄요 악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영역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 그것이 죄이고 악이다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획하고 이루실 일이다. 창조와 구원사업의 주체는 항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할 대상이다.
피조물이란 만드신 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드신 분의 뜻에 따라 존재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인간은 구원자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 편에서는 자기들의 생각이 맞고 자기들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느냐?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가? 예수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요,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좋은 일들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좋은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를 보여주신다. 어디에서 보여주시는가? 복음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래서 성바오로가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 1,16-17)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놓아주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좋은 일들을 보려면 먼저 복음을 읽어야하고 그 말씀이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위해서 묵상하고 묵상하면서 보게된 좋은 일들과 나의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무엇을 내가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였는 가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을 성찰해야하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발견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로 돌아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회개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좋은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면서 나 나름대로 거기에 동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하나 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이요,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요,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유다인들처럼 예수님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좋은 일을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서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굳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제시해준 방법에 따라 살아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나에게 좋은 일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그리고 그것을 생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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