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루가 24,13-35)
말씀의 초대
베드로가 가진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뿐이다. 베드로는 태생적으로 불구였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 준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부여하셨다(제1독서).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을 잃고 크게 실망하여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다. 엠마오까지는 두세 시간가량 걸릴 것으로 보이는데 낯선 사람이 나타나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간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여 빵을 나눌 때야 비로소 그 낯선 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가 40일 동안 이냐시오 피정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피정을 거의 끝맺음할 무렵, 저는 주님 부활의 복음들을 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깨닫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좀처럼 저의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에 빠져 마무리 시간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복음 말씀을 관상하게 되었습니다.
관상을 시작하면서 엠마오로 함께 걸어갈 동료를 찾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려 보았지만 마땅히 마음에 와 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길을 걷자고 나서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저에게 피정 지도를 하고 있는 신부님이셨습니다. 저의 관상 기도 속에서 그분과 저는 복음 속의 제자가 되어 엠마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에 도착할 때까지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무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엠마오에 도착해서 주님 없이 둘이서 빵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요? 함께 빵을 나누던 신부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앉아서 저에게 빵을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나도 놀라고 감격스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정 내내 그토록 찾던 주님께서 바로 저의 영적 지도 신부님과 함께 저를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인생길의 동반자 안에서 엠마오 여정을 재현해 주십니다. 내가 절망에 빠져 시름에 젖어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이웃을 통하여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내 삶을 빌려 또 누군가에게 부활하신 주님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길에서 만난 사람,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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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죽음을 보았기에 마음이 심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체념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마음을 ‘닫았던’ 것입니다. 그들도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깨달음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스승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체념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마음을 닫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삶을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바뀐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사랑의 질책이십니다. 실제로 마음을 정하는 데 답답하고 느립니다. 우리 안에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있는 탓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고집을 부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뜨겁게 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이 곧 부활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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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토종 새’입니다. 덩치는 꿩과 비슷하며 긴 부리를 갖고 있습니다. 키위라는 이름은 ‘원주민’ 말로 수컷의 울음소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200년 전만 해도 500만 마리가 넘었는데 지금은 8만여 마리로 줄었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지폐에도 등장했던 키위 새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멸종 위기의 원인은 단순했습니다. 고통과 역경이 ‘없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먹이가 풍족하다 보니 서로 다툴 일이 없어졌습니다. 천적도 없기에 도망칠 일도 없어졌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서서히 ‘날개와 눈’이 퇴화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몸의 기능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풍요와 평화’는 안락사의 시작임이 입증된 예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시골로 내려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실망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스승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에다 스승님을 죽인 예루살렘이 싫어서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겪고’ ‘죽음을 수용하는’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눈을 뜹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부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고통을 피하려 들면 누구나 ‘키위’ 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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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는 어디에 있는 마을이며 무엇으로 유명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따뜻한 동네로 인식되어 있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내려갑니다. 스승은 사형수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한마디 항변도 해 보지 못한 서글픔에 그들은 살던 곳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인생무상이랄까, 삶의 서글픔이랄까,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와는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을 추종했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몰래 예수님을 도왔던 상인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서로 실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실망과 몰이해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길에서 만난 분이 부활하신 스승이심을 자연스레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던 겁니다. 주님을 만난 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의 앞날은 당당함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청주교구 사제 연수 중입니다. 총대리 신부님께서는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주님께서는 온몸에 꼭 필요한 피요, 우리는 그 피를 온몸에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동맥과 같다고 하시며 피의 흐름을 가로막는 찌거기를 말끔히 씻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동맥경화가 오면 약물이나 시술을 통해 치료해야 하듯 연수나 피정은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도구 되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서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 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이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 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 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사랑합니다.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전삼용신부-
사도행전 8장에는 재밌고 유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이 갑자기 필립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길로 가라고 일러주십니다. 필립보는 사람도 다니지 않는 그 길을 왜 가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님께서 원하시니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니 마차를 하나 보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에게 그 마차에 다가가라고 일러주십니다. 필립보는 그대로 합니다. 그 마차에 가서 가만히 들어보았더니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였다. 지상에서 그의 생애가 끝났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즉, 그가 읽고 있었던 것은 이사야서 53장 야훼의 종 마지막 노래입니다. 즉, 야훼의 종이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통을 받고 죽어야한다는 내용입니다. 필립보는 그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 재정관리 내시였습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이 내용에 나오는 내용이 예언자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다른 누군가를 두고 한 말인지를 묻습니다. 필립보는 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는 내용임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합니다. 그 내시는 바로 가마에서 내려 세례를 받기를 청합니다. 필립보는 그에게 바로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를 다른 어느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 내시는 필립보가 갑자기 사라져 놀라긴 하였지만 기쁨에 넘쳐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위의 내용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구 하나 설명해 주지 않고 설명해 주어도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눈이 먼 다음 예수님은 아나니야에게 나타나 그에게 안수를 해 주라고 그를 보냅니다. 아나니야는 그에게 안수를 해 줍니다. 그 때서야 그의 눈에 있는 비늘이 떨어지면서 성경을 바로 보게 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의 상징임을, 광야에서 그들이 마셨던 물이 바로 성령님임을, 또 그 물이 흘러나왔던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1코린 10,1-4 참조) 만약 아나니야가 아니었다면 그 진리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진리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되도록 스승을 보내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스승의 모습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여자들로부터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확실한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슬쩍 다가서서 무슨 일로 그렇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서를 들어 당신께서 왜 돌아가셔야 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지 그들의 가슴이 뜨겁도록 설명해 주십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났더니 그 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그 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전에는 그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진리를 깨닫도록 보내 주시는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어 대신 진리를 깨닫도록 이끌고 계심을 말입니다. 혼자 만나려하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원하는 누구에게나 인도자를 보내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바오로처럼 그 도움을 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잡이들을 자신의 교만으로 놓치지 말도록 합시다.
<<짧은 묵상>>
가끔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위대한 분이셔서 나중에 꼭 주교님이나 더 높으신 분이 되시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 제가 얼마나 마음이 오그라드는지 상상을 하지 못합니다. “자매님, 세속적인 눈을 버리세요. 위대하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위대하다고 주교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더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더 낮아지셔서 조롱과 멸시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놓고 다투기도 하였어요. 특히 예수님을 세상의 왕좌에 앉히려고 했던 사람 중에 유다가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예수님을 팔아넘겼죠. 정말 저를 위해 기도하시려면 세상에서 잊혀지고 낮아지기를 원하신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기도해 주세요. 자매님의 세속적인 생각대로라면 그 분이 부제품만 받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부제품도 설교를 하기 위해서 억지로 받은 것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기에 자매님은 지금 거꾸로 기도하고 계신 거예요.” 엠마우스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곳의 반대쪽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의 힘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우리도 성경 말씀을 가슴 뜨겁게 깨닫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야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이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그 분을 알아보았던 것은 오는 길에서 말씀으로 충만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정표는 성경말씀입니다. 충만한 성찬의 전례를 위해서 말씀의 전례가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됩니다.
Track.07 - 엠마우스 (신상옥과 형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