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2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말씀의 초대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가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52,13ㅡ53,12)를 읽고 있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주님의 종’이 곧 예수님을 두고 한 예언이라고 밝히면서 그에게 세례를 베푼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빵이 되셨다. 그분을 믿고 그 빵을 먹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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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성체를 모신 다음 주로 무슨 기도를 하시는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오셨는데 뭔가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신자에게 물었습니다. “영성체를 하시고 무슨 기도를 하세요?” 하였더니 그분께서 “옛날에는 주로 청원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그저 저의 사랑을 고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애틋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다 아시지만 우리가 입으로 당신께 사랑을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마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도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주님,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한다는 말은”이라는 노래를 아시는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 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우리 마음을 얼마나 밝게 하고 희망을 주는지를 금방 깨닫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순간은 이렇게 주님과 우리가 사랑한다는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을 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우리가 하나 되는 은총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 교회의 성체성사,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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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은 목숨입니다. 목으로 쉬는 숨입니다.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끝장입니다. ‘생명의 빵’은 이 ‘숨소리’를 있게 하는 에너지라는 표현입니다. 하늘이 사람의 목숨을 관장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보호자’가 되십니다.
실제로 많은 이가 죽음의 고비를 넘깁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습니다. 돌아보면 위험하고 아찔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보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하느님의 손길로 봅니다. 그런 믿음이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조신철 가롤로는 천민 출신입니다. 23세 때부터 북경을 오가던 ‘동지사’의 마부로 일했습니다. 30세 때 ‘정하상’ 성인을 알게 되어 입교합니다. 그 뒤에도 계속 마부로 일하며 선교사 영입에 깊숙이 관여합니다. 언제나 어려운 처지의 교우들을 찾았고, 자신처럼 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다 기해박해(1839년) 때 체포됩니다. 선교사들의 은신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침묵했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돌아보면 천민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양반이나 부자가 무슨 소용 있을는지요? 모두 그분께서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감사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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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은 요한 복음 6장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그 빵을 성체성사 안에서 체험합니다. 진정 우리는 얼마만큼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고 있는지요? 성체에 대한 일차적 신심은 정성입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규정한 것도 정성을 기울이라는 의도였습니다. 지금은 공심재가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한 시간 전까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할뿐더러 입 안에 침이 생기면 뱉어 내도록 하였습니다. 서양 신부님들의 지나친 규제가 아니라 그만큼 정성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그 규정을 끔찍이도 지키셨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성체를 모시면 삶이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분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인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면 아무리 자주 모셔도 그 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고도 생명이 자라지 않는 이유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성체를 모셔야 신앙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인생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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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35-40절)과 오늘 복음(44절-51절)을 함께 보면 바로 연결되지 않고 41-43절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빠진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41-43절) 하시고는 44절의 말씀을 계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 자신에 있다. 예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와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20년 이상 목수의 아들로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神的) 출처를 밝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기 보다는 이를 일축(一蹴)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신비(神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시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립하였다. 이 점을 예수께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계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내심(內心)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성체(聖體)인 것이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결국 육체의 생명을 영위할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聖體)인 것이다.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를 받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성체는 '찾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박상대 신부-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44-51)
성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비춰졌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에로, 성직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결국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응답의 책임이 주어지지만 하느님은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름을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 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