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지도자들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시어 예언서에 약속된 바를 이루셨다고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되며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이르러야 할 최종 목적지이시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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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제 하루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요? 어제 하루 동안 한 일을 기억하려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께 일은 더 기억하기가 어려워지고, 일주일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데 왜 기억조차 할 수 없이 흘러가고 있는지요?
전문 바둑 기사들이 바둑을 두고 나면 ‘복기’(復棋)라는 것을 합니다. 복기란 바둑의 승부가 끝난 뒤 자신이 둔 바둑이 어디에서 잘 두고 못 두었는지를 살피려고 되풀이해 보는 것입니다. 전문 기사들은 약 300여 개나 되는 돌을 놓으면서 승부를 가르는데 자신이 놓은 돌을 순서대로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요?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들은 바둑돌을 놓는 순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돌 하나를 놓을 때마다 그 돌이 바닥판에 미치는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놓은 돌을 그대로 다 기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시간도 무의미하게 보내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됩니다. 한순간 한순간 바둑돌을 올려놓듯 말과 행동이 삶과 이웃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하고 살면 우리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지성은 살아온 시간들을 잊는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는 거룩한 기억으로 새겨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루하루 우리를 의미 있게 살도록 하는 ‘삶의 물음’으로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가?’ ‘나의 판단과 선택은 진리에 가까웠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는 말과 행동을 했는가?’
☆☆☆
삶의 활기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분명 젊은 나이건만 생기가 사그라진 노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런가 하면 얼굴에는 주름이 있고 흰머리가 성성하지만, 젊은 기운을 확확 내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이건 노인이건 여자든 남자든 ‘삶의 활력’을 잃으면 시들어 버린 꽃과 진배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 안에 ‘삶의 기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수없이 성체를 모셨고 수없이 기도와 희생을 바쳤으며 오랫동안 믿음의 길을 걸어왔다면,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분명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인생 역시도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습니다. 오르막만 있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오르막만 있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내리막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내리막이다.’ 하고 느끼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끄심에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활기’를 간직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내려온 뒤’에 결정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은퇴한 뒤에 힘들게 살고 있는지요? 예수님 안에 ‘길과 생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 김정식 로제리오
★★★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과학에서는 모르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의 분석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안다고 할 때 ‘앎의 수단’은 감?都求?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감??초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강생하신 당신을 통하여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출현을 ‘육화’(肉化)라고도 합니다. 고깃덩어리로 오셨다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표현입니까? 성경을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는 칡넝쿨로 만든 기둥이 있습니다. 칡은 덩굴나무입니다. 제멋대로 자라기에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듯한 재목이 된 것은 커다란 전나무 옆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꼿꼿한 전나무를 닮으려다 기둥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야 하는 요즈음 세상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곧게 살기에는 크나큰 힘이 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나무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말씀 곁에 머물러야 곧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삼밭의 쑥대처럼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해
-*반영억라파엘신부*-
가끔은 셋방살이의 서러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세를 올려 달라 요구하고, 어렵던 가게를 얻어 최선을 다하여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니까 이제 그만 비워달라고 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삶의 터전을 잡으려 애쓰는 곳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밀려나게 될 때 어떻게 일구어 놓은 터전인데 이렇게 힘없이 물러나야 하나 하는 아픔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산란해 집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믿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한 형제요 자매임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 당한다 할지라도 때를 기다리며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어려울 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끼리 남에게 힘들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고 또 인내로 참고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도 회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문이다.”(요한10,9) 하셨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십니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17,17)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요한1,14)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일상의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의 문
-박민서 신부-
우리는 많은 문들을 지나갑니다. 방문, 현관문, 식당문…. 이 문들의 특징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과는 다릅니다. 구원으로 가는 마음의 문은 고리가 안에 있어서 밖에서 두드릴 수는 있어도 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열어야만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내가 열어야만 열릴 수 있지만 항상 열려 있는 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향하는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10개월 동안 기다리다가 자궁 문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올 때 엄마의 도움도 받지만 전적으로 자신이 온 힘을 다하여 자궁 문을 나오는 과정을 갖게 됩니다. 나오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고통과 두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 밝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때 아기와 엄마의 고통은 경이로운 감탄과 축복과 은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과정이 고통일 수 있지만 그 너머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도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속에 숨지 않고 스스로 고통의 문을 열고 나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용서합시다.
-김기현신부-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의 결과가 나쁘게 예상될 때 마음이 산란하고, 중요한 시험이 다가올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또 가까운 사람들과 다툼이 있을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산란해 질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관계에서 주고받는 갈등과 상처가 가장 크고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것들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정할 수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용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음주운전자로 인해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분노와 슬픔으로 살았던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러진 팔이 붙는 것과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팔이 붙기는 하지요. 하지만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팔이 비뚤어지게 되죠. 또 팔이 너무 약해져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다시 부러지게 되지요.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방치된 상처는 아물긴 아무는데 뒤틀리고 나약한 내면세계를 만들 뿐이지요.” 이처럼 용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그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기로 결심하기가 힘든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작업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종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3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인종의 부모님은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이의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인종이의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절대 당신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보면 무척 괴롭습니다.” 이렇게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 행위로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 점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한 바로 그 주간 주일미사 중에 아들이 주님 품에 안긴 것을 환시로 본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고 나서 인종의 어머니는 비로소 가해자 학생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실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같은 공동체 자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매를 멀리했는데, 우연히 그 자매와 함께 기도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봉사자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자매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우리 서로 용서하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래, 당신 잘못을 당신이 알겠지?”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했다고 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과 반드시 관계를 재계하고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화해는 용서가 이루어진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고, 쌍방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느 한 쪽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을 때는 아직 화해할 시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참조)
오늘은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화병에 걸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는 일’에초점을 맞춰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