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1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7-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바오로는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길을 걷는다(제1독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필립보는 예수님 안에 온전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복음).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이 늘 바치는 ‘기도’이자 ‘성가’라고 할 수 있는 시편에는 곳곳에 하느님 얼굴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신화적 표현은 있지만 그분의 얼굴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목소리나 천둥과 구름 같은 표징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먹기도 하시고 마시기도 하시며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뜬금없이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에게서 유다의 남자, 비범한 나자렛 사람의 얼굴은 보았지만, 그분 삶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의 얼굴’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자렛 사람으로 그려진 초상이 아니라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심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 그 참된 ‘사랑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사랑하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그리움의 목적지는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해야만 그분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무심코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간청했던 병자들은 예외 없이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나을 수 없다고 체념했던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갔기에 기적을 안고 돌아갔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자주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머뭇거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되는데도 미적거립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하게 부르면 ‘영혼’이 듣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목소리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애절함이 없기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애절함은 인연에서 생깁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나는지요? 맺고 싶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연에서 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애절함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왔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기도를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오늘만큼은 인연을 위해 정성과 간절함을 더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지 않도록 늘 애써야 합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지내 왔습니까? 그럼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수도 없이 이렇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삼위일체의 주님을 찾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님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늘 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에는 감사를 드리고, 시련에는 그 의미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내이름으로 청하면
-*반영억라파엘신부*-
한 부부가 생각하였습니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성당에 필요한 것을 도울 수 있을 터인데……돈을 벌면 이렇게 하자’ 하면서 계획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당야유회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1등, 2등의 상을 모두 타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기뻤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기쁘게 성당에 쓸 수 있도록 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니까 꼭 이루어 주시는구나! 부부는 선한 지향은 돈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방법으로 꼭 들어주신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3)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체험하였습니다.
본당에서 사용하는 성광을 박물관에 보관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복제하여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물을 사용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귀한 것을 잘 보존하여 후세에게 남겨주는 것도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의향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분들은 너무도 기쁘게 성광을 봉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몫을 하라고 얘기한 것이 아닌데 품위가 있는 좋은 것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필요한 사람을 뽑아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됨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라2,20-21)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주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려야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챙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공허한 만족보다는 주님을 차지해서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야고보사도의 말씀을 상기하시길 희망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라도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영안(靈眼)
-김찬선신부-
인도에 가면 많은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절에 가면 모든 부처상의 미간에 보석이 박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여인의 화장이요 부처의 치장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눈을 인도 사람들은 제 3의 눈(the third eye), 지혜의 눈(the eye of wisdom)이라고 하고
불자들도 慧眼, 즉 지혜의 눈이라고 합니다.
이 혜안은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것들과 그런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 혜안이 없으면 사람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세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제자들, 토마와 필리보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전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어야 알 수 있고 믿어야 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靈眼이 열리고 영안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와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 영안을 가진 사람은 그저 예수만을 보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아 뵙고 성자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성자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 뵙습니다.
뛰어난 영안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프란치스코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쪼가리를 정성껏 줍는 것을 보고는 같이 가던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종이쪼가리를 그렇게 정성껏 주웁니까?”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종이쪼가리에도 하느님, “하”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종이쪼가리가 설사 이단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안의 소유자입니까!
이런 영안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구더기를 보고 구더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위를 보고 바위이신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이쪼가리는 쓰레기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걸리적거리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주님마저도 이러하니 우리는 서로간에 더 그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버리는 버림받은 돌, 서로가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영안이 있으면 우리는 주님 성전에 요긴한 모퉁이 돌,
서로를 딛고 하느님께로 올라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나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는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나를 스스로 쓸모없는 돌멩이, 그래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고
걸리적거리는 돌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 또한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이요 성전이고,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는 디딤돌, 받침돌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귀담아들읍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