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생명의 날)

2011. 5. 29. 오전 7:12:12

글자

 

 

2011 5 29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생명의 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21)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 순교 이후 교회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제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어 나간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 고을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고쳐 준다. 사마리아인들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는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하며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박해자들에게 온유하게 대하라고 당부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호자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분께서는 ‘진리의 영’이신데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믿는 이들은 알게 된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느 인권 변호사가 TV 프로그램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법 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을 걸고 축하를 해 주는데, 사실은 현수막에 ‘근조’(謹弔)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변호사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죽음처럼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무죄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변론을 할 때 의뢰인과 똑같이 억울하고 손이 벌벌 떨리는 심정이 되어야만이 무죄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호하는 한 양심 있는 변호사의 마음이 이럴진대, 우리의 변호자이신 성령께서는 더할 나위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 8,26 참조). 우리의 나약함과 억울함을,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인간 존재가 겪는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같은 처지와 심정이 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십니다.
진정으로 양심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숨 쉬게 합니다. 우리 내면의 영적 세계에서는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는 성령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답답하고 사는 것이 힘들 때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시지 않겠다고 하신 오늘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겁니다. 스승의 애정이 성령의 강림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자비의 생활이 성령 체험의 전제 조건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보다 사랑을 더 중히 여기셨습니다. 지키는 신앙에서 베푸는 신앙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용서 역시 사랑의 결과입니다. 미운 마음을 버렸기에 용서가 채워진 것이지요. 내 것만 잡고 있으면 하느님의 것은 자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소서, 성령님. 오시어 우리를 채워 주십시오.’ 그러면서도 비우는 데 인색했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언젠가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끊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포기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 있다면 지금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우는 행위의 출발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소리 없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기쁨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6주일(요한 14,15-21)

서로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는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던 개념하지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마음속에 묶어둡니다. 그래서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저의 집안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큰형님께는 장남이 아들, 둘째가 딸입니다. 형과 형수님께서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아들이 장가들 때가 되니 며느리감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에게 애인이 생기니까 마음이 흔들리셨습니다. 형님은 그저 좋으셨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으십니다. 곧 며느리가 생긴다는 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형수님은 저 놈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하면서 서운함을 자주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짜증을 내셨습니다. 마침내 결혼을 하였지만 아들을 통해 며느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딸을 출산하였는데 둘 다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아이를 형님과 형수님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 손녀가 누구를 따를까요? 할머니에게 안가고 꼭 할아버지께 가는 거예요. 늘 형님 등에서 잠이 들어요. 이것을 우리 어머니가 보시면 사뭇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에미는 뭐하고 네가 그리 업고 다니느냐고….

 

이제는 딸을 결혼 시켜야 되는데 딸을 놓지 못해요. 떨어져 있지만 매일 전화하고 사사건건 ….형수님께서는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만 자녀에게는 사사건건 잔소리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딸을 빼앗겨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소유하고 있으니까 빼앗기고서는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고 떠난 놈은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서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나 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불행한 여자시리즈도 있는데 불행한 여자는‘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그중에 상태가 아주 심한 것은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여자’랍니다.

 

어찌 되었든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무조건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모두를 내 놓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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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

-안병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의 내용을 전해 주고 있고,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그 언약이 실현되고 있는 생생한 모습을 전해 줍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상호간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항구하게 보여 주셨으므로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 역시 항구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충실하게 계명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충실성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충실성과 당신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협조자 성령과의 관계를 설정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변론자’ 또는 ‘협조자’, ‘위로자’라고 부릅니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전파하신 가치들을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가치들을 우리 안에서 내면화시키고 심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 성령님이십니다. 나아가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심어진 희망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우리의 이웃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케 하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로 남겨 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전해 받은 메시지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연약한 상태로 놓아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충실성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입니다. 사랑의 길에 들어선 연인들이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부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모습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진리의 성령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신앙인들과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 지를 말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을 배워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원천으로 한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같은 실천으로 같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요약하여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이 살아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습을 드러낸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의 죽음 후, 많은 사람들 안에 확산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실천하신 삶이 나타나게 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제자들의 실천 안에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그분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신앙인의 실천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얻어서 자기 개체를 유지하고 또한 종족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무자비하고 포악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 삽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기에 같은 질서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생태를 기술하면서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 동물 본연의 질서만 있다면 당연한 이름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을 만들어서 인간의 동물적 약육강식과 포악함에서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약육강식하고 포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각종 횡포를 하는 것,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상대를 중상하는 것, 돈 몇 푼을 위해 인색하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은 ‘털없는 원숭이’들의 합법적 약육강식의 포악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포악함으로 인간은 인간다워지지도 않고, 인간다운 사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한 사람 희생하더라도 더 큰 진실을 위해 헌신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국선열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생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도 일종의 살신성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 인류역사 안에는 아름다운 인간 사랑이 지속됩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이라 부릅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자기 한 사람 더 잘 되겠다는 약삭빠른 수작이 아닙니다. 한 번씩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광신도 집단의 주장과 같이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가, 내세에 가서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의 실천 안에 인간 삶의 최종적 보람을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서 보람을 찾는 존재입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놓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큰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 보람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부모의 흐뭇한 보람이 있고, 제자를 아끼고 사랑해서 유능한 인재로 키운 스승의 보람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자기 직장에 충실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느끼는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삶의 보람을 심는 노력을 우리는 헌신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도 있고, 하느님이 아끼시는 인간 생명에 헌신할 수도 있으며, 재물 혹은 권력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인은 예수님의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헌신을 모든 순간에 하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이라 소외당한 사람을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누구도 버려지거나 불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권력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은 인간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헌신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헌신을 보면서 그것이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발생하는 모든 헌신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봅니다. 그 생명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협조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깨닫는데 먼저 예수님의 역할이 있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은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진리이고, 성령은 그 헌신의 진리가 우리 안에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능력과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대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다.” 신앙인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이 보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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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소서 성령님!

-유영봉 몬시뇰-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2,1)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14,21)라고 하신다. 협조자이신 성령께 우리를 열고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1.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형비리가 터지고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현대사 안에는 대통령 아들들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약을 끊지 못해 다섯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는 대통령의 아들, 소통령이라고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다 아버지 재임 기간 중에 쇠고랑을 찬 아들, 그 다음엔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노벨상을 탄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아들들이 있었다. 입만 열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던 자들이 알고 보면 자기 주변 하나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개인 치부(致富)와 탈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국민들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게 된다. 누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참 정치인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할 때면 모두 열심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누가 참 신앙인인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엔 성당 공사를 하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공사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교회가 이웃의 아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참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야고2,17) 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신앙은 입술로나 겉모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참 신앙의 척도이며, 기준인 것이다.

2. 계명을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야

열매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대인들은 매사에 그 지향이나 목적의 순수성을 문제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실적(實績)만을 전부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속담에는 "모로 가나 기어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목적의 순수함이나 과정과 방법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계명을 지키되 참으로 사랑으로 지켜야 한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 분은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1베드3,17)라고 하신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계명을 지키되 할 수 없이 하거나 장사꾼 적인 이해 타산으로 한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주일을 지키고, 교무금과 헌금을 내고, 교회 활동을 하면서도, 이런 일을 소홀히 하면 혹시 벌(罰)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그것은 자녀다운 자세가 아니라, 노예적인 태도이다. 사랑으로 계명을 지킬 때 모든 일은 구원적인 가치를 지닌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어떤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치는 그 일의 외양(外樣)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지향에 있다고 하겠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 할 때, 그것은 크고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고 활동을 할 때도 거기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3.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기적인 목적이나, 장사꾼 적인 계산이나, 노예적인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나 인간적인 계산이나 욕심으로 할 때는 거기에 항상 악(惡)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어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매사에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 스며들게 되고 하느님의 기운이 넘치게 된다. 우리는 다음 주일 승천 축일을 지내고 그 다음 성령강림 대 축일 맞게 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님과 사도들이 기도 중에 성령을 기다렸듯이 성령강림 전 9일기도를 해왔다.

성령은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오신다. 예수님은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5-16) 고 하셨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오소서 성령님!", "주님 이끌어주십시오" 하며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께 나의 영적 가난을 고백하고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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