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5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율법 때문에 자주 부딪친다. 이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지를 검토하고자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인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확신한다(제1독서).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줄기에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일치해야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주님과 일치된 삶이란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가 왜 신앙인이 되었는지요? 교회에 한 발 더 들어와 봉사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리는 자아실현을 위해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의 어떤 ‘신념’을 성취하려고 교회의 봉사 직분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입니다. 가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나무에 붙어서 수액을 공급받아 전달할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잘남도 못남도, 높음도 낮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구성원은 모두 다 예수님이라는 큰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입니다. 그 말은 교회의 일은 자기의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나무를 가꾸시듯이, 우리를 돌보고 가꾸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신념’이나 ‘가치 체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맺는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살아 있는 가지가 되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해서 ‘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주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쳐 내신다.’ 열매는 기쁨의 신앙생활입니다. 오랫동안 믿어 왔는데도 여전히 즐거운 신앙이 아니라면 원인을 찾아봐야 합니다. 성당 다니는 이유가 아직도 막연한 의무감이라면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생명입니다. 잎이 아무리 무성해도 뿌리가 약하면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물과 양분을 잎과 줄기로 올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의 역할이 없으면 시들해지고 맙니다. 기쁨이 생겨날 리 없습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의 뿌리 또한 ‘아무도 모르는’ 적선이며, 기도이고, 선행입니다. 이러한 실천이 없었기에 허전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최고의 자선을 무외시(無畏施)라 했습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행위를 가장 높게 평가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스트레스’를 없애 주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를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좋아지면, 주님과 맺는 관계도 좋아집니다.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의 도우심 안에 머무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겁주는’ 신앙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내세우는 지도자는 ‘바른 지도자’가 아닙니다. 남의 두려움을 없애 주면, 자신의 두려움도 언젠가 사라집니다.
☆☆☆
어느 고을 수령은 피리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연주에 능한 악사들을 모아 먹을 것과 집을 제공하며 극진히 대했습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관리를 속이고 악사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합주 때면 피리 부는 흉내만 냈습니다. 하지만 모양새는 끝내주었습니다. 고개를 흔들고 머리를 끄덕이며 어떤 악사보다 진지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며 보너스까지 챙겼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죽자 아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합주보다 ‘독주’를 좋아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소식을 듣자 ‘가짜 연주자’는 하루 종일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더니 밤중에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엉터리가 탄로 나면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신다.” 신앙생활에서 결실을 맺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어정쩡하게 흉내만 낸다면 결국은 돌아서게 된다는 암시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성사 생활에 힘쓰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뿌리는 언제라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은총과 연결되어 있으면 신앙생활은 튼튼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총에 닿아 있지 않기에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줄기를 떠난 잎과 가지는 말라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접촉이 결핍되면 영적 생명은 힘을 잃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선행을 베풀지 않을 때입니다. 성사 생활을 게을리 할 때 그분과의 만남은 고갈되고 약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공허해집니다. 인생 역시도 무의미해집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된 존재이기에 한쪽이 멍들면 다른 쪽도 비슷한 결과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영적 생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육적인 삶도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삶의 갈증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왜 살고 있습니까? 당연한 이 질문에도 답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질문 자체를 꺼립니다.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연스레 감?岵隔?물질적인 것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삶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생은 꽃밭이 아닙니다. 가시밭과 절벽이 공존하는 사막입니다. 실패와 좌절을 만나면서 ‘삶과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뿌리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께 닿아 있어야 행복해집니다. 그분은 포도나무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활 5주간 수요일(요한15,1-8)
포도나무와 가지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장독주변에는 딸기가 심어져 있었고 우물가에는 포도넝쿨로 그늘 막이 형성되었으며 포도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시고 돌아오시면 펌프로 물을 길어올려 등에 물을 부어드리고 설익은 포도를 따먹기도 하였습니다. 형은 이른 봄이 되면 포도나무에 새싹이 돋기 전에 큰 줄기를 남기고는 가지를 잘라냈습니다. 저는 우물을 덮고 있던 가지를 잘라내는 것을 너무 아까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바로 그 가지에서 새 싹이 돋고 포도가 열렸습니다. 아랫집 담장을 끼고 앵두나무와 커다란 밤나무가 있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남몰래 앵두를 따먹고 이른 아침이 되면 마당에 떨어진 알밤을 줍기도 하였습니다. 작은집 뒤뜰에는 커다란 배나무가 있어 좋았는데 이제는 먼 기억 속에만 남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15,4)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서 새 싹이 돋고 새가지를 만든 그 곳에서 포도송이가 열리는 것을 보면 결국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가 튼실해야 열매도 잘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고 예수님께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니라 새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버리고 새싹을 움 틔워서 새 열매를 맺는 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자라고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지 못한다면 이미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제자의 관계는 영양을 주고 받는 다시 말하면 사랑과 순명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내면을 채워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혹시라도 주님의 것으로 채우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채운다면 열매도 역시 세상의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양을 받으면 주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신 주님 안에 붙어있지 않은 것이요, 미사 안에서 영성체를 하면서도 내 삶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성체의 삶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성체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체로 영양을 섭취하였으면 성체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하거늘 그렇게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나는 과연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맞는가?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