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월요일(요한15,26─16,4ㄱ)

2011. 5. 30. 오전 6: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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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30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15,26─16,4ㄱ)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so that you may not fall away.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은 필리피에서 안식일 유다인들의 기도처로 향하다가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 가운데 리디아라는 여자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오로 일행을 따듯하게 맞이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광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의 시대가 오면 그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주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당신을 증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인간이면 누구나 굴레처럼 안고 사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독은 높은 정신 세계를 가진 고등 동물에게만 존재하기에,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고독합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홀로 있음’의 자리입니다.
고독은 고립과는 다릅니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열려 있지만, 고립은 함께 있어도 막혀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세상 한복판에서도 고요하지만, 고립은 고요 속에서도 혼란스럽습니다. 고독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과 통교하는 장소이지만, 고립은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분열과 단절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자리에서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늘 고독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사명을 홀로 감당하시며 사셔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매우 심한 유혹에 시달리실 때도,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뒤 군중의 환호를 뒤로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실 때도, 그분 삶의 한가운데에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십자가상에서 성부 하느님마저도 침묵하실 때, 예수님의 고독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런 고독과 친구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시달릴 때도, 사람들에게 얻은 인기와 환호에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있어도, 고통 중에도, 신앙인의 고독은 삶의 그 모든 순간에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견디는 것입니다.

☆☆☆

 

 

사도들의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박해를 먼저 받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를 자신들의 한 지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 준수를 요구했고, 이방인 교우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하곤 했습니다. 사도들은 무작정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루살렘에 모여 대책을 논의합니다. 기원후 50년에 열린 사도 회의입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는 표현처럼 율법에 따라 처형되었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순교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 철저한 고통이며 고독입니다. 혼자 겪는 싸움일 뿐입니다. 신념이 있다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완벽한 은총의 개입이 순교의 본모습입니다.
복자로 시복되려면 기적이 둘 이상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순교자의 경우에는 순교 자체를 기적의 실현으로 봅니다. ‘하나의 기적이 채워진 셈입니다. 한편 교황에게는 한 건의 기적을 생략해 줄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느 나라든 순교 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순교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 큰 순교라면, 악습을 끊는 것은 작은 순교입니다. 하늘의 힘을 받으면 결국은 이루어집니다.

☆☆☆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는 주문모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정약종, 황사영, 강완숙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801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합니다. 그들은 풍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우촌입니다.
이후 교우들은 선교사를 청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냅니다. 교황청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청원서의 서명에는 언제나 신태보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밀사를 보내는 경비 역시 신태보가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열정적이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 영입은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정해박해 1827년 호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의 여파로 신태보는 경북 상주에서 붙잡혀 전주로 이송됩니다. 가혹한 심문과 형벌을 수없이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주 부윤은 배교하지 않는 교인은 무한정 옥에 방치해 굶주림과 탈진으로 죽게 했습니다. 신태보 역시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 ‘12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839, 71세의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합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증언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처럼 신태보는 무려 12년을 견디며 예수님의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인내의 순교자입니다.

★★★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방인 교회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이 아니라 아시아 쪽에 살다 보니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료들의 순교 소식을 듣는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역시 순교 못지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순교 소식도 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잡히고, 어떻게 재산을 빼앗겼으며, 어떻게 회당에서 쫓겨나 죽었는지 속속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밀고자들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고발하고 재산 때문에 배교하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스승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임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노년의 그는 결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아름다운 행위지만 현실에서는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끝없는 투쟁이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신념이 강하다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총의 힘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끝까지 견뎌 낼 수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목숨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순교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 성당은 순례지 성당으로 손님도 많고 신심행사가 많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뒷정리가 쉽지 않습니다. 묵묵히 감당하시는 신자들을 보면서 감사할 뿐입니다. 가끔은 내일처럼 도와주는 타 본당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큰 행사를 감당한 분들입니다. 힘들고 고달픈 일을 이미 겪은 분들이 인지상정으로 도와줍니다. 굿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그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반대를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시켜 주시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증인

-강영구신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은 나자렛의 목수 출신 떠돌이 랍비입니다.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뱅이이고(마태8,20) 그분의 제자들도 별볼일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나병환자들,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린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새 삶을 누립니다.
성령은 이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이라고 증언합니다. 성령(聖靈)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惡靈)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마르코1,24; 5,7)

이제 예수님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으로 하늘나라(天國)의 상속자가 된 우리들이 예수님을 세상 한가운데서 증언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답게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고 맑고 밝고 향기로워야 합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가 싱싱한 푸르름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듯이, 우리들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이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는 밝고 환한 당신의 삶이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성령 하느님: 진리이며 협조자 †

-박상대 신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1차 고별사(13-14장)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되며, 이 주제들은 2차 고별사에서 더욱 심화된다고 했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은 2차 고별사의 시작부분에서 단순히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확충되었다. 이는 지난 부활 제5주간 중반부터 봉독된 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이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입증되었다.(15,1-17) 농부이신 아버지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가지들인 제자들은 모두 같은 하나의 사랑으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比喩)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머문다. 그것은 비유(比喩)가 어떤 논리적 귀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간에 원하시는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셨고, 그 비유를 '아버지-아들-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정립하셨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문제는 이론(理論)이 아니라 실제(實際)와 현실(現實)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아주 출중한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현실적으로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만 실제에는 항상 변수(變數)가 있기 마련이다. 제자들이 우선은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하여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을 방해하는 변수는 바로 세상 그 자체이다. 세상은 열매를 맺으려는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심지어는 죽음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은 늘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불신(不信)을 내포하는 양면성의 변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변수(變數), 즉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는 한편(15,18-25), 변수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 주신다. 그 방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發)하시는 성령이시다.(26절)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맞이할 고난(苦難)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협조자'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곧 제자들의 믿음(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다. 여기서 '믿음'(fides)이란 그 '내용'(fides quae; contents)과 그 '행위'(fides qua; act)를 함께 뜻한다.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內容)뿐만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 하는 행위(行爲)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며,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장담(요한 13,36-38)과 실제로 스승을 거듭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요한 18,15-18.25-27)을 보라. 또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메시아고백이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하는 장면(마태 16,13-23)을 보라.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27절) 세상을 향해 '무엇을' 증언(證言)해야 할지를,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진리의 성령'께서 일러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할 때(2절) '협조자'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 끝까지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이는 비단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의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이시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삼아 건설된 교회가 현존하는 세상 끝날까지 활동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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