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수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요한 16, 12-15)

2011. 6. 1. 오전 6: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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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일 수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 16, 12-15)

 

When he comes,  the Spirit of truth,
he will guide you to all truth.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아테네 시민에게 설교한다. 그는 그곳 사람들이 제단에 새겨 둔 “알지 못하는 신”은 바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이심을 밝힌다. 이교 지역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통하여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노력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일러 주실 것이고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마음이 바른 정직한 사람은 우상 때문에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유스티노 성인께서 순교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성인께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시어 잡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받으셨을 때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순교를 하십니다. 성인께서는 진리와 삶의 태도는 하나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잡신을 섬기는 사람이 마음이 올곧을 수 없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마음이 비뚤어지고 정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사람들이 온갖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세속적인 명예든 권력이든 관계없이 실체도 없는 허상들이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 행세를 하며 우리 삶을 휘두르면 우리 마음은 늘 혼란스러워집니다. 마음이 바르고 정직하게 살지를 못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 삶이 허황되고 허구를 쫓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당신 가슴속의 간절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모스 예언자가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아모 3,7)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하고자 하셨던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자신이 아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제자들을 통해 당신께서 아시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가치에 물들어 갈수록, 불안한 미래 때문에 잡신을 섬기며 혼란한 삶을 살수록,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고 간절해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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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14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태어납니다. 당시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영적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18세 되던 해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합니다. 이후 고독과 명상으로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오상 기적을 받습니다. 예수님처럼 손과 발과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녀는 30세 되던 해에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로마로 모셔 오는 중재에 나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공합니다. 당시 유럽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대립 교황의 해결입니다. 이후 성녀는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습니다. 그 편지들은 오늘날 『대화』라는 책 속에 대부분 남아 있습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닙니다. 정리된 신학을 연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가르침이 복잡할 리 없습니다. 사람들이 각색하고, 조건을 달고, 계산하며, 순서를 따지기에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요. 무심하게 바라보면 모든 것이 소박합니다. 관계 또한 따스하고 평범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질 때 삶은 소중하게다가옵니다. 올바른 시각은 단순한 시각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께서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를 무시하고 깔보는 자는 성령께서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어떻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간주할 수 있을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예사로 비난하고 거칠게 불평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요. 원망하고 공격한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합니다.
비판할 때에는 자신의 살을 깎는 느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신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아픔을 갖고 하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늘 그분을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은 갑자기 옵니다. 성령께서는 예고 없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붙잡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가 복잡할 리 없습니다. 사람인 우리가 계산하고 조건을 달고 까탈을 부립니다. 순서를 따지며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주변은 늘 새롭습니다. 단순하게 인정하면 사람은 언제나 달리 보입니다. 단순함이 성령 체험의 첫걸음입니다.

★★★

 

깨달음 역시 은총이며 하느님의 이끄심입니다. 준비되어 있으면 누구에게나 깨달음은 주어집니다. 아니, 준비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은총은 갑자기 옵니다. 성령께서는 예고 없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깨달음을 위한 첫 준비는 바른 시각都求를 올바르게 보려는 노력입니다. 불교에서는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더하지도 말고 덜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정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득도하여 돌아왔지만 여전히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뀐 것은 산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바뀌어야 내가 바뀐다.’는 마음에는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가 복잡할 리 없습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고 조건을 달고 순서를 따질 따름입니다. 오히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산천초목부터 달리 보입니다. 모든 관계를 단순하게 인정하면 사람이 달리 보입니다. 바른 시??단순한 시??또 다른 표현입니다.

 

 

  

부활 6주간 수요일 (요한16,12-15)  

진리의 길

  -반영억라파엘신부-

부산 저축은행비리 수사가 정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은행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도 비리를 알고도 눈감았다고 합니다. 감사위원이라는 사람도 거액을 챙겼습니다. 한국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유서를 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고 관련된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폭력조직에 매수된 선수들이 짬짜미를 했다거나, 은퇴한 선배가 후배를 꾀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은 까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알고 그 안에 자유로워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깨달아 아는 것은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잊고 있다가 자기가 부모가 되거나 부모가 세상을 뜨게 되면 그 사랑을 새삼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루카 복음 15장을 보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적고 있습니다. ‘방탕한 아들’은 집에 있을 때에도 집을 떠났을 때에도 변함없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말합니다. “제 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저를 아버지의 품팔이 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17절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심을 떠나 아버지의 말씀에로, 세상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 잡아 참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것입니다.”(성 막시밀리안 콜베)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정신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완전한 의지에 적합한 것을 완수한다면 그리스도님을 만나는 최상의 길이 실현될 것입니다.”(끌레멘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고,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상황, 처지에도 불구하고 항구하게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눈은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눈길은 앞으로만 곧게 두어라. 바른 길을 걸어라. 네가 가는 길이 튼튼하리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말고 악에서 발길을 돌려라.”(잠언 4,25-27) 사랑합니다.

 

진리의 영이여, 오소서!

-이준석신부-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생과 신앙에 관한 많은 의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시시각각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착한 사람은 고통을 받고, 무자비하고 탐욕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성경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들이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삶에 매우
근본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 해답을 쉽게 알아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밝혀낼 수 없는 질문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 모든 의문의 열쇠를 풀어주실 분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지혜를 허락하셔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의 해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긴 시간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여 주님이 수난을 당하던 시간에 도망치고야 말았던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나서야 스승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제자들을 거리로 뛰쳐나가게 했고 그들을 용감한 복음 선포자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도 매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의 가려진 눈을 열어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 도정호 신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다. 이 말씀은 어디를 떠나시려는 인상이 드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활기간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사실 이번 주간 내내 우리에게 들려지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누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이라는 말씀 속에 어떤 심정이 담겨져 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며 제자들과 시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과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지 못하는 제자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알아듣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승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투신하고 증언하기에도 용기가 부족한 상태이고, 이렇게 제자들의 상황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에 너희가 당신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전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내면상태나 영성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알아듣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신앙인으로서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참 위로가 됩니다. 항상 부족하고 성숙해야 하고, 덕을 쌓아야 할 우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또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서 알아가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우리들이기에 억지로 알아듣도록 서두르지도 않겠다는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의 신앙의 높이에 당신을 낮추어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곁에 있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우리주님, 억지로 주입시키려고도 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을 오늘 우리는 만났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스스로 맡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기다려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오는 말씀

-손우배 신부-

 철학을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께서는 성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오로가 이때는 어떠어떠한 마음이었고, 이때는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 때로는 기도를 깊이 한 사람들이 나누는 내용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성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단지 성경의 지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믿음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지식을 통한 선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즉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성경구절이 어느 날 마음 깊이 와 닿는 체험을 하곤 합니다. 바로 이때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차원에서만 머문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말씀들을 내면화시키고, 마음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바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오시어, 제 마음을 당신의 말씀으로 흠뻑 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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